아버지 잃고 수형생활 한 이충연 부부
6년 전 그날
그날, 결혼한 지 8개월 된 새댁이던 정영신(43)씨는 가게 옥상에서 건너편 남일당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개발에 따른 용산 4구역 철거민 등 32명이 생존권을 주장하며 전날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짓고 농성에 들어간 상태. 시아버지와 남편이 거기 있었다. 오전 7시가 지나 어느 순간 불길이 치솟더니 건물이 화염에 휩싸였다. 시아버지도 남편도 다 나왔을 줄 알았다. 살려고 올라간 거지 죽으려고 간 게 아니니까, 당연히 불을 피해 뛰어내렸으려니 했다. 남일당 건물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보였다. 소방차의 소방 호스가 그 사람에게 물을 쏘고 있었다. 달려가 항의하자 현장에 있던 철거용역이 정씨를 잡으려 했다. 얼른 자리를 피해 시어머니를 찾았다. 시어머니는 이미 실신 상태였다.
그 시각, 시아버지와 함께 망루에 있던 남편 이충연(42)씨는 기절해 있었다. 불이 나자 창문에서 뛰어내려 불이 꺼질 때까지 기절해 있던 그를 119 구조대가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이씨는 입원 1주일 만에 구속영장이 청구돼 구치소에 수감됐다.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치사죄로 4년 동안 수감됐다가 2013년 1월 특별사면으로 나왔다.
시아버지(고 이상림ㆍ당시 72세)가 돌아가셨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남편보다 체력이 좋았으니 남일당에서 나와 바로 검찰에 끌려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용산 4구역 재개발에 따른 철거 반대에 앞장선 시아버지는 진작에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시아버지를 만난 것은 그날 밤 병원에서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유족에게 알리지도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부검을 마친 뒤였다. 시신을 보고도 믿어지지 않아 DNA 검사를 하겠다고 하자 경찰은 지문으로 신원을 확인했다고 했다. 신원 파악을 위해 부검을 했다던 설명과 어긋나는 말에 그럼 왜 부검했냐고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건 발생 만 하루도 안 지나 다섯 구의 시신을 다섯 명의 부검의가 달라붙어 2시간 반 만에 모두 부검했다. 극히 이례적이다. 유족도 모르게 그토록 서둘러 부검한 이유가 무엇인지 정씨는 지금도 납득할 수가 없다.
2009년 1월 20일, 이충연 정영신 부부는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부모님이 남일당 건너편에서 20년 넘게 하던 갈비집을 호프집으로 개조해 장사를 하고 살던 신혼부부의 단꿈이 그날 박살나 버렸다.
철거민들이 망루 농성을 시작한 지 25시간 만인 20일 오전 6시 30분, 경찰특공대가 진압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큰 불이 나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사망했다. 진압작전은 오전 8시경 완료됐다. 검찰은 망루에서 살아난 철거민 7명을 구속 기소하고 15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구속 기소된 7명은 1심 재판에서 5~6년형, 항소심에서 4~5년 형을 선고받았고 2010년 11월 대법원은 원심(4~5년 형)을 확정했다.
사람들이 ‘용산 참사’라고 부르는 이 사건을 유가족은 ‘용산 학살’이라고 부른다. 6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왜 불이 났고 왜 죽었는지 명확히 밝혀진 게 없다. 유족들은 철거민 사망자 5명 중 2명이 화재 당시 남일당 밖으로 나갔다는 증언이 있고 갈비뼈가 함몰되거나 복부 내장이 모두 사라지는 등 시신 훼손이 심한 것으로 보아 타살과 은폐 조작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유족들은 부검 이후에야 시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검찰과 재판부는 화재 원인을 농성 철거민이 던진 화염병이라고 주장하지만 분명한 증거를 대지 못했다. 검찰은 수사기록 1만여쪽 중 3,000여 쪽의 공개를 거부했다.
유족들은 당시 채증 영상 중 망루 진압 과정을 찍은 게 없다는 경찰의 주장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2009년 1심 재판 당시 경찰이 제출한 증거 제 63호는 특공대의 진입 과정을 담고 있지만, 망루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갑자기 툭 끊겼다가 망루 건너편 옥상에서 화재를 촬영한 영상으로 이어진다. 망루 화재 전후, 망루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이 빠진 것이다. 유족들은 영상이 있는데도 경찰이 감추고 있다고 믿는다.
6년 후 지금
6명의 목숨을 앗아간 남일당 참사 현장은 지금 주차장이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이 내걸었던, 단군 이래 최대 건설 프로젝트라는 52조 원 규모의 용산 개발이 부동산 침체로 날아간 뒤 폐허로 방치됐다. 참사 이후 서울시가 상가 세입자 철거민들에게 약속했던 공사장 함바집 운영권은 공사 자체가 없으니 감감 무소식이다.
용산참사 6주기 다음날인 21일, 남일당 터에서 만난 이충연 정영신 부부는 가지고 온 차를 굳이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시켰다. 이씨는 “6년 전 대책 없는 철거에 반대하는 철거민들을 핍박하던 용역회사가 지금도 이 곳 주차장을 관리하고 있는 게 싫어서 일부러 그랬다”고 말했다. 부부가 운영하던 호프집은 남일당 터 뒤편 폐허에 있었다. 호프집을 한 건 2년 정도, 그러나 나중 1년은 철거 용역들의 행패에 장사를 거의 못했다. 그들은 죽은 비둘기나 쓰레기 더미를 가게 앞에 버려두고 가게에 손님으로 와서는 욕하고 소란을 피웠다. 참사 당시 숨진 선친은 심지어 며느리 앞에서 용역들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용산참사 6주기를 앞두고 남일당 터에서는 시민단체들의 추모제가 있었다. 추모제 당시 시민들이 펜스에 꽂고 간 국화꽃은 사라지고 없다. 용역회사가 뽑아 버렸다. 펜스에 붙여뒀던 벽보들도 다 뜯겨서 자국만 남아 있다. “여기, 사람이 있었다“고 알려주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오가는 행인들은 무심코 지나친다. 6년 전 그날 사람의 목숨을 삼켜버린 뜨거운 불과 그보다 더 뜨거운 눈물과 분노는 휑한 터를 쓸고 가는 겨울 바람이 전할 뿐이다.
이씨가 말했다. “이렇게 6년 간 방치할 거면서, 왜 그리 급하게 철거민들을 쫓아내고 무리하게 진압했을까요. 당시 정치인들은 이런 비극이 다시 없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바뀐 게 뭐가 있죠? 진상 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이뤄진 게 없잖아요.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다 모른 척하고, 철거민과 유족들만 범죄자가 됐어요. 이게 제대로 된 나라입니까.”
19대 대선 당시 진상 규명 요구에 공감한다고 했던 박근혜 후보는 대통령이 되자 용산참사의 진압 책임자인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을 공항공사 사장으로 임명했다. 총선 때 경주에서 출마한 김 사장은 용산참사 유족에게 사과하겠다고 했지만 말로 그쳤다. 이후 공항공사 사장 취임식에 유족들이 몰려가자 몰래 쪽문으로 들어가 취임식을 하고는 오히려 유족들을 업무 방해로 고소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대권 욕심에 용산 재개발을 추진했던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은 용산참사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다. 너도나도 뉴타운 공약을 내걸어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그로 인해 양산된 철거민이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전세난 등에 대해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부부는 용산참사는 끝난 일도, 용산만의 일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아내 정씨는 참사를 겪고 나서야 주변의 억울한 사람들을 돌아보게 된 게 부끄럽다고 했다.
“그 전에는 집회로 도로가 막히면 짜증 내고, 철거에 반대하는 천막농성을 보면 어지간하면 다른 데 가서 살지 왜 저러나, 했어요. 왜 싸울 수밖에 없는지 몰랐으니까요. 용산참사를 곱지 않게 보는 눈이 있는 것도 알아요. 사정은 안 됐지만 이제 그만해라, 장사하던 사람들이니 장사나 열심히 하지 왜 데모하러 다니냐, 그만 잊으라고들 하는데, 잊는다고 잊혀지나요?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데, 우리를 이렇게 만든 자들은 떵떵거리고 잘 사는데, 우리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은 채 범죄자가 됐는데, 어떻게요? 용산참사 후 우리가 조금만 더 잘 싸워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세월호 같은 비극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죄스럽기도 해요. 우리의 무지가, 무관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참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남편 이씨가 4년 만에 감옥에서 나왔을 때 정씨는 투사가 돼 있었다. 시어머니는 부부보다 더 열렬한 투사가 되었다. 용산참사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싸움을 함께하면서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동지가 됐다.
“시아버지 돌아가셨지, 남편은 감옥 갔지, 집은 없어졌지(부부가 부모님 모시고 살던 집은 용산 재개발 구역에 포함돼 남일당보다 먼저 철거됐다)… 처음엔 그저 숨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어요. 하지만 용산을 벗어난들 행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날을 잊을 수 있을까 싶더군요. 그래, 싸우자, 나 혼자 골방에서 울고만 있을 게 아니라 함께 싸우자, 용산이 전국에 있구나, 그들 곁에서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자고 마음 먹었지요. 남일당 망루에서 감옥이라는 또다른 망루로 간 남편이 세상에 나왔을 때 느낄 낯섦을 줄여주는 다리 노릇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싸웠어요. 강정마을, 밀양, 쌍용차 등 또다른 용산들과 연대하면서.“
남편 이씨가 출소 후 1년 가까이 용산 참사를 알리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한편 곳곳의 또다른 용산과 연대하는 활동으로 정신 없이 지낸 부부는 최근 남일당에서 멀지 않은 숙대 입구 역에 ‘레아’라는 이름의 수제맥줏집을 차렸다. 버스가 다니는 큰 길에서 20m 들어간 골목에 자리를 잡았다. 문 연 지 이제 40일쯤 됐다. 가게 내는 데 들어간 돈은 약 5,000만원. 페인트칠과 공사, 가구 제작 등을 인권 활동가들,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 쌍용차 해고노동자 등 여러 사람이 도와줘서 인건비가 거의 안 든 덕분에 그 돈으로 해결했다. 안주 중 노가리를 강정마을에서 소개해 대주는 등 여러 사람이 힘을 보태주었다.
용산참사 유족들이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다더라, 그 돈으로 가게 차렸겠지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니다. 출소자를 대상으로 하는 천주교 사회교정사목위원회에서 창업교육과 자금 대출을 받았다. 이씨는 “거액 보상금 받았으면 대출 받았겠냐”고 말했다.
부부가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는 주변 상인들은 그냥 ‘세월호 노란 리본 달고 다니는 집’으로 안다. 부부는 이 맥줏집을 자신들처럼 쫓겨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용산참사 전후, 출소 이후, 맥줏집을 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여준 사랑에서 희망을, 살아갈 힘을 얻었어요. 저희들처럼 쫓겨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알리고 위로 받고 힘을 모으고 대안을 만들어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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