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정의를 담보하지 못을 때, 아니, 불의를 수호하는 첨병으로 행세할 때, 자력구제는 소망충족의 서사로 열광적 지지를 받는다. 복수와 응징이 횡행하는 원시 야만으로의 회귀를 두려워하며 자력구제의 금지를 천명한 국가는 이 열광 앞에서 대체로 무력하다. 에토스와 파토스가 저마다 폭발하며 충돌하는 자력구제의 서사는 오늘날 그리스 비극을 갱신하는 효과적 방법으로 언제나 비장하다.
탁월한 문학적 성취로 아메리카 원주민 문제를 미국 현대 문학의 중요한 테마로 끌어올린 루이스 어드리크(61) 장편소설 ‘라운드 하우스’는 이 자력구제의 서사를 성장소설의 형식으로 변주한 작품이다. 2012년 전미도서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추리소설처럼 박진감 넘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깊은 한숨을 자아내는 웅숭깊은 인물들, 독자의 감각에 즉물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정확하고도 섬세한 묘사 덕분에 500쪽에 달하는 긴 분량에도 단숨에 읽게 된다. 어드리크는 “지속적인 작업과 한결 같은 성취로 미국 문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공로”로 지난해 펜/솔 벨로 상을 수상했다.
전작 ‘비둘기 재앙’과 짝을 이루는 ‘라운드 하우스’는 13세 소년 조를 1인칭 화자로 삼아 한 가족에게 들이닥친,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던 재앙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조는 ‘비둘기 재앙’에 원주민 보호구역 부족판사와 부족민 등록 전문가로 나오는 부부의 아들. 유복하고 지적인 가정에서 완벽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오던 소년이 어머니의 강간이라는 사건으로 풍비박산의 위기에 처한 가정에서 겪게 되는 혼란과 분노, 슬픔과 고독에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교첩했다.
1988년도를 배경으로 삼는 소설은 아름다운 인디언 여인인 조의 어머니 제럴딘이 평화로운 일요일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어디론가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서 시작된다. 강간과 폭행으로 끔찍한 몰골이 돼 돌아온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일체의 말과 교섭을 거부한 채 침묵 속으로 도피하고, 판사인 아버지는 인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사건 발생 장소는 원주민들의 성소인 라운드 하우스. 라운드 하우스는 원주민 보호구역과 주(州) 토지, 개인 사유지가 맞물리는 곳이라, 사건 발생 장소를 정확히 밝혀야만 부족법과 주법, 연방법 중 어느 법의 적용을 받을지 결정되는 곳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얼굴을 가린 채 당한 일이라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범인은 평소 판사 가족에 적대감을 품고 있던 백인 남성 린든 라크임이 드러나지만, 원주민 토지 안에서 발생한 범죄에 대해 원주민이 아닌 자는 기소되지 않는다는 법 조항으로 인해 그는 이내 석방된다. 조의 집 주변을 얼쩡거리는 린든 때문에 살해 공포에 휩싸인 어머니는 저승에 사는 미라처럼 변해버리고, 아버지는 슈퍼마켓에서 우연히 만난 린든과 몸싸움을 벌이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스텐트 삽입술을 받는다. 우러렀던 판사 아버지는 무력하기 짝이 없고, 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어머니의 온기와 아버지의 사랑이 집안을 가득 메웠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조의 바람은 무참히 짓밟혔다. 살의의 포로가 된 소년은 영혼의 친구 캐피의 도움을 받아 린든을 응징할 계획을 세운다.
소설은 소년의 결정과 행동에 연루된 여러 사람들이 보여준 희생과 배려, 이해와 공감으로, 사춘기 소년들의 끊임없는 왁자지껄에도 불구하고, 더 없는 깊이를 획득한다. 특히 린든의 쌍둥이 여동생 린다 아줌마와 친구 캐피는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인물들이다. 소년은 부모를 위시해 그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들이 이룬 침묵의 공동체 안에서 조는 고통을 견디는 형벌을 기꺼이 감수한다. 정의를 실현하는 데는 처벌이 따른다는 것을, 조가 그 처벌을 받고 있음을 그들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평생을 끌어안게 될 고통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결정을 통해 그는 비로소 남자가 되고, 어른이 됐다. 가정에는 다시 평화와 온기가 찾아왔지만, 그는 이미 그때의 그 소년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특별할 것 없었던 어린 시절의 숱한 나날들은 그래서 서럽고도 아프다. 이 장대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작은 영원 속으로 끈질기게 이어질 슬픔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그저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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