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 순혈주의 유감
“최민호 사건이 왜 판사 비리냐, 그가 검사였던 시절 인연이 사건의 발단이니 ‘전 검사’ 비리 사건이지. 당장 기사 제목 바꿔라.”
지난해 4월 8일 한국일보가 최민호 판사가 거액의 검은 돈을 수수했다는 비리를 단독 보도한 아침 대법원 고위 법관들의 성난 목소리에 잠을 깼다. ‘자신이 속한 법원을 사랑하는 법관이 많구나’라고 넘기기엔 격앙의 정도가 심했다. 보도 취지를 설명하고 그들의 마음을 다독이려는 노력은 지방 고위 법관들의 전화까지 받으면서 사라졌다. 약속이나 한 듯 내뱉은 일관된 항변에서 한동안 잊었던 법원의 순혈주의, 그 민낯을 봤기 때문이다.
어려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서도 가장 우수한 그룹으로 평가돼 법관으로 선택된 그들은 거리낌 없이 “이상한 경력 법관을 뽑아 신뢰의 타격을 입은 법원도 피해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판사들은 ‘이상한’과 ‘경력 법관’이라는 단어를 연이어 강조했다. 행간에는 ‘(검사ㆍ변호사 출신이 아닌) 사법연수원 출신의 순혈 판사만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다’는 암묵적 강조가 흘러 넘쳤다.
판사들은 “수사기관에서도 미적지근한 반응이던데 (한국일보 보도가) 오버하는 거 아니냐”고도 했다. 검찰이 최 판사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뒤에도 수사결과 발표가 늦어지자 대놓고 ‘오보’라고 넘겨짚었다.
기세 등등하던 판사들의 모습은 지난 달 20일 최 판사가 구속되자 비로소 달라졌다. 이례적으로 대법원이 먼저 기자회견을 자청,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약속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5일 최 판사가 구속 기소되자 대법원은 법원감사위원회 신설 등 비위법관에 대한 대응 방안도 내놓았다.
하지만 이날도 ‘차나 한 잔 마시자’며 기자를 부른 고위 법관들은 “(경력법관이 아닌) 사법연수원 출신 현직 판사가 이런 비리를 저지른 적은 없지 않았냐” “사건 발생 시점이 (검사 시절인지 판사 시절인지) 애매해 법원 식구 중 누가 책임지긴 어려운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대법원의 거창한 해결책 발표 뒤에, 속으로는 ‘문제적 경력 법관 한 명의 일탈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법관들의 순혈주의에는 ‘가장 우수한 집단인 우리가 그럴 리 없다’는 자긍심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런 자긍심이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한국일보 보도에 대한 예단으로 이어졌다. 이런 인식이라면 아무리 좋은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냉정한 내부 감사와 비리 감시는 어려울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또 다른 비리 판사가 등장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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