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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세상의 정예요원 '닉 쿠퍼', 이름도 좋다!

입력
2015.02.0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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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내가 경계하는 장르다. 시간을 빨아들이는 또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적 스케일의 서정’운운하며 유혹하는 친구도 있는데, 혼자 노는 지금도 하루가 짧은 나로서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애써 외면하곤 한다. 최근 출간된 노리즈키 린타로의 작품집 <녹스 머신>(반니)에 듀나(소설가, 영화평론가)가 쓴 표사- 퍼즐 추리소설에 대한 연구와 예찬이 극한에 이르면 어쩔 수 없이 SF의 지평선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막힌 예- 같은 걸 보면서도 나는 내가 갖는 두려움의 근거(?)를 재확인하곤 한다.(궁금증에 굴복해 읽은 바, 표제작 ‘녹스머신’은 다행히 고만고만했다. 이 작품은 영국 작가 로널드 녹스가 1929년 자신의 문집 서문에 쓴 탐정소설 규칙 10개항(이른바 녹스10계)가운데 가장 돌출적인 제5항 즉 ‘탐정소설에 중국인을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라는 다소 뜬금없는 구절의 사연을, 영화 ‘인터스텔라’적 시간 여행과 추리적 상상력으로 해명(?)한다. 하지만 뭐랄까, 나로선 과학(S)은 좀 어려웠고, 허구(F)는 좀 싱거웠다. 궁금하신 분들은 읽어보시길.)

마커스 세이키. 신작 <브릴리언스>는 한국 독자의 그에 대한 인상을 바꿔놓을 것이다. 그는 미시간대에서 언론학과 정치학을 복수전공(1992~96)했고, 졸업 후 그래픽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커스 세이키. 신작 <브릴리언스>는 한국 독자의 그에 대한 인상을 바꿔놓을 것이다. 그는 미시간대에서 언론학과 정치학을 복수전공(1992~96)했고, 졸업 후 그래픽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군말이 길었던 건 이제 소개하려는 마커스 세이키의 신작 <브릴리언스>(정대단 옮김, 황금가지)가 SF스릴러여서다. 나는 이 책을 밤새워 게걸스럽게 읽었고, 지난 새벽 마르고 충혈된 눈 끔벅이며 아껴 읽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SF는 대개 가까운 미래가 배경이었던 듯하다. 그러다 보니 10,20년 전 작품의 경우 과학의 보폭이 작가의 상상력을 추월해버려 벌써 낡은 인상을 주는 작품도 없지 않았다. SF의 생명력은 상상력의 정교함 못지않게 상상력의 배포도 크게 좌우되는 듯하다. 하지만 세이키는 브릴리언스의 배경을 2013년 현재(영어판 발표연도)로 설정, 가정법으로 그 맹점을 당당히 돌파한다.

1980년대부터 지구에는 호모 사피엔스(‘노멀’)의 능력을 초월하는 ‘브릴리언트’들이 듬성듬성 태어나기 시작한다. 상대의 마음을 읽는 브릴리언트, 슈퍼컴의 연산능력을 지닌 브릴리언트, 데이터 패턴화 능력을 지닌 전략가…. 1세대가 30대에 이르면서 노멀 인류, 특히 권력을 쥔 지배집단은 모종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전체 인구의 1%인 브릴리언트를 차별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한다. 교육을 통제하고 의식과 인성, 활동을 통제하고, 사생활 전반에 대한 사찰 계획까지 수립한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저항운동가들이, 테러리스트들이 생겨난다.

소설은 “라디오 방송의 진행자는 전쟁이 곧 벌어질 거라고 했다. 마치 기대하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밤이 되자 쌀쌀해진 사막 날씨에 코트도 없이 떨면서, 쿠퍼는 그 진행자가 개자식이라고 생각했다”는 단락으로 시작해서 “미래는 기다려 줄 것이다. 적어도 잠시 동안은”이라는 건조하고 함축적인 문장으로 끝난다. 600쪽이 넘는 이야기는 테러 분석ㆍ대응부서의 최정예 요원 닉 쿠퍼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추리와 액션, 갈등, 고뇌, 통찰과 회의. 자유와 차별과 폭력과 기만 같은 윤리와 권리의 문제, 새로운 가치의 문제, 과학과 휴머니즘의 숙명적 불화 등등이 주요 등장인물들의 사건과 대화와 상념을 통해 집요하게 제기된다.

-앞으로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질 거라는 생각.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는데, 아무도 뒤로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는 생각. 우리가 만들어내고 있는 이 모든 공포에 대한 생각. 아카데미와 모노클은 똑같아. 같은 공포의 양면이라고. 그리고 내게는 두 아이가 있어.

-범죄 세계의 거래란 왈츠만큼 엄격한 규칙이 있는 춤이었다. 모두가 스텝을 알고 있으며, 조금만 거기서 벗어나는 동작도 경계의 대상이 된다. 제인이 천천히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작은 소리가 났다.

-“다른 길도 있어. 믿거나 말거나, 나도 나 자신이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해. 나도 정의의 편이야.” “우리 모두가 그렇지. 그래서 삶이 복잡해지는 거고.”

브릴리언스의 사연들은 2015년 인류가 맞닥뜨린 문제들- 서방과 아랍세계의 갈등의 은유로도 읽히는데, 가령 “난 지고 있는 편의 병사요. 하지만 당신이 쫓았던 존 스미스는 아니오.(…) 그 존 스미스는 태어나지 않았소. 그는 만들어졌지. 왜냐하면 누군가의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이오”같은 한 테러리스트의 말은, 몇 자 고쳐서 2015년 지금 시사 칼럼의 한 구절로 삽입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미시간주에서 태어나 결혼과 함께 시카고에 정착한 세이키는 전작들에서 시카고의 오래된 공장지대를 주된 배경으로 삼았고, 이 작품에서도 자신의 도시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다. “그는 영원한 이방인으로서, 모든 장소를 15도 정도 삐딱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는 도시에 대한 나름의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 도시의 지배적인 산업이 건축 양식부터 정치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층위에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LA에는 호화저택이 즐비했고,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은 주식 차트를 닮았고,(…) 시카고는 노동자들의 거주지역에서 출발한 도시였고,(…도시의) 가장 진실한 부분들은 언제나 녹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커스 세이키의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하현길 옮김, 비채)와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장성주 옮김, 황금가지)
마커스 세이키의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하현길 옮김, 비채)와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장성주 옮김, 황금가지)

마커스 세이키의 전작들이 흡족했던 건 아니다. 전작들-이라고 해야 번역된 건 이 작품을 포함해 세 권(발표작은 모두 14편)에 불과하지만- 의 개성(이자 아쉬운 점은)은 지극히 현실적인 범죄를 소재로 비교적 현실적인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방법으로 돌파해가는 이야기라는 점이었다. 손을 씻고 가정을 꾸리려는 한 전과자가 갓 출감한 옛 동료의 협박에 못 이겨 새로운 범행에 가담하는 이야기인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입힌다>(황금가지), 영화배우 아내의 살인 누명을 쓰고 단기기억까지 잃어버린 극작가가 자신의 기억과 함께 비밀과 음모를 밝혀가는 이야기인 <대니얼 헤이스 두번 죽다>(비채). 가령, <칼날...>의 범행에 걸린 돈은 100만 달러, 후자에서는 50만 달러다. 근래의 범죄소설 판돈으로 보자면 생계형 범죄급이다. 형사가 등장하긴 하지만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크라임 스릴러’가 상대적으로 느리긴 하지만 저 두 소설은 좀 심해서, 나는 아우토반 위에서 낡은 디젤 SUV를 탄 것 같았다. 심지어 <대니얼…>은 300페이지쯤 넘어가서야 사건 자체의 개략적인 정황이 드러난다. 기억상실증 주인공과 함께 거기까지 가는 동안 겪은 답답함이란….

그의 작품은 그처럼 너무 정직하고 너무 치밀했다. 좀처럼 뻥을 치지 않고, 독자를 사로잡기 위해 쉽게 영웅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은 드문 미덕이지만, 나로선 그 미덕 때문에 그의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을 것 같았다.(마이클 코넬리는 그를 두고 ‘최고의 스토리텔러’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들의 동료에 대한 평은, 작품외적 영향을 제쳐두더라도, ‘나를 빼고’라는 생략된 전제를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그리고 ‘나’쯤 되는 작가는 ‘내’생각보다 늘 많은 법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브릴리언스>는 SF스릴러라는 (나의)장르적 ‘장애’를 넘어, 또 구구절절이 읊어댄 까슬한 선입견까지 머쓱하게 하면서, 재미와 감흥을 선사했다. 책 중간중간 삽입된 ‘소설 속 2013년’의 광고들, 다시 말해 브릴리언트가 존재하는 2013년 미국의 정치와 일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광고들은 또 그것들대로 유쾌하고 씁쓰레한 상상을 자극한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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