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록원이 어제 공개한 설날 관련 기록물을 들춰보니 ‘음력과세방지에 관한 건’이 눈길을 끈다. 1954년 입안된 이 정부 문건에는‘광신적 제반 인습은 무지한 대중생활에 뿌리 깊이 만성화한 암적 존재이므로 이를 급속히 시정해 민족문화 발전에 일대 혁신을 기해야’운운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전근대적 악습으로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주범으로 묘사된 것은 음력설이다. 이런 인식과 함께 정부는 10여 가지의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 세배 다니지 말 것, 떡방아ㆍ가축도살ㆍ밀주조 단속, 일반 상가 철시 금지 등이다.
▦ 음력설은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오랜 세월 푸대접을 받았다. 을미개혁으로 1896년 태양력을 수용하면서 전통 명절인 음력설이 사라지고 양력 1월1일이 공식적인 ‘설날’이 됐다. 그러나 개혁이 민중들의 반발에 부닥치면서 그때부터 양력설은 ‘왜놈 설’로 치부됐다. 음력설을 쇠는 것은 마치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일제는 음력설을 말살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떡방아간을 폐쇄하고 흰 옷을 입고 세배 다니는 사람들에게 검은 물이 든 물총을 쏘아 얼룩이 지게 했다.
▦ 해방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정부가 계속 음력설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이중과세 폐단이었다. 그럼에도 음력설은 꺾이지 않았고 논란은 매년 이어졌다. 1981년에는 정부에서 ‘신정과 구정’이라는 장문의 보고서를 내놨는데 논리가 걸작이다. 구정을 공휴일로 하자는 주장은 고유풍습을 계승하자는 관점에서 나온 것인데 제사와 세배는 구정 날 아침이나 저녁에 하면 되니 굳이 쉬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민속놀이는 여가를 활용하면 되고, 도시근로자 귀성은 신정연휴나 크리스마스에 가면 될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명절이라 해서 반드시 공휴일이어야 할 이유가 없음이 증명됐다고 멋대로 결론지었다.
▦ 음력설은 1985년 ‘민속의 날’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절반쯤 복권됐고, 89년에야 완전히 명예를 되찾았다. 정부는 음력설을 ‘설’이라 명명하고 사흘간의 휴무를 줬다. 우리가 지금 당연한 듯 쇠고 있는 설에는 스스로를 낮추고 폄하했던 아픈 역사가 스며있다. 이런 의미를 안다면 구정이니 신정이니 하는 용어와 음력설이니 양력설이니 하는 명칭도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 설은 음력 1월1일 하나뿐이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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