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호황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만 돌아봐도 ‘명량’과 ‘국제시장’이 극장가를 주도하며 충무로의 건재를 알렸다. 하나 마냥 환호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흥행은 얻었으나 영화적 완성도를 잃었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나온다. 그럴 듯한 배우와 감독을 앞세워 그만그만한 장르로 익숙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 날카로운 평들이다. 6개월 만에 ‘영화라고’ 코너를 재개한 두 기자의 우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라제기기자(라)=요즘 한국영화를 보고 나면 썩 기분이 좋지 않다. 흥행작이든 아니든 좋은 영화를 봤다는 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경석기자(고)=얼마 전부터 한국영화 라인업을 볼 때 설레고 기대가 되는 작품이 없다. 상반기에 20편이 개봉한다 치면 그 중 몇 편은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새는 거의 없다.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같은 빅네임이 없기도 하지만 그 밖의 감독들에게도 기대가 안 간다. 소재 측면에서도 흥미가 안 간다. 반복되는 영화가 많아지는 느낌이다.
라=비슷한 생각이다.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스태프의 영화들이 늘고 있다. 카메라 움직임과 조명 등 기술적인 것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감독의 색채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동네를 가나 맛이 똑 같은 프랜차이즈 빵집 빵을 먹는 기분이 한국영화를 보면서 요즘 많이 든다.
고=감독이나 제작사의 영화가 아닌, 투자배급사의 영화가 많다. 그런데 투자배급사들의 가장 큰 조언자는 모니터 시사 요원들이다. 투자배급사 직원들에게 ‘이 영화 어때요?’라고 물어보면 흔히 모니터 시사에서 몇 점 나왔다고 말한다. 점수가 높으면 예전엔 꽤 재미있나 보다 생각했지만 배신을 몇 번 당하고 나니 모니터 시사 평점이 높은 영화라면 잘 다듬어진 평범한 상업영화라는 느낌이 먼저 든다. 예측이 쉽고 공식에 맞춰 흘러간다.
라=모니터 만능주의가 있다. 시장에서 좋아하는 영화는 무조건 좋다는 인식이다. 물론 영화의 상업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영화적 긴장을 상품으로 만드는 그런 상업성이 요즘 없다. 에피소드들 모아 모아 영화가 굴러가는 느낌이다. 플롯이라는 개념이 사라졌다고 할까. 최근 영화 중에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조선명탐정2)이 그랬다. 125분을 채울만한 이야기는 아닌 듯 했다.
고=아무리 코미디라도 스토리 라인의 긴장이 있어야 하는데 끝까지 웃음으로만 밀어붙인다. 초반엔 좀 재미있었지만 같은 방식의 웃음을 2시간 이상 밀고 가는 건 무리였다. 그 이상의 고민을 않거나 막은 느낌이다. 감독 탓인지, 투자배급사의 의도인지 모르겠다.
라=설 연휴 대목은 가족 단위, 극장에 잘 안 오는 사람들이 몰리는 시기다. 가볍고 쉬운 영화를 겨냥한 것이라고 해도 너무 관객을 일반화한 경향이 있다. 그 대목에 함께 붙은 영화들을 감안하면 ‘조선명탐정2’는 흥행이 잘 된 영화가 아니다.
고=흥행 실패다. 500만~600만명 정도는 봐야 성공했다 할 수 있는 영화다. 관객들이 설 연휴 때 이 영화를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라 마땅한 게 없어서 본 거다. 어부지리로 300만명을 넘겼다. 연휴 때 흥행이 잘 된 영화가 연휴 뒤 ‘조선명탐정2’처럼 꺼꾸러지는 것도 흔치 않다. 설 연휴가 만들어준 관객이지 영화 스스로 만든 관객 수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보통 1편이 잘 되면 2편에 대한 기대치가 있어서 더 잘 되곤 하는데 설 연휴라는 메리트도 제대로 찾아가지 못했다.
라=관객들의 만족도가 높아 보이지 않더라. 할 일은 없는데 잘 시간을 그럭저럭 보냈다는 평이 들리더라.
고=내겐 굳이 극장까지 안 가고 내년 설 특집 방송으로 봐도 무관한 영화였다.
라=1편인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에 이어 ‘조선명탐정2’를 만든 김석윤 감독은 방송PD 출신으로는 최초로 영화 흥행에 성공한 감독이다. 그런데 그리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영화가 그럭저럭 흥행을 했지만 완성도가 그리 좋지 않아서 그런 듯하다.
고=‘쎄시봉’은 예상보다 흥행이 안 됐다. 내겐 별로였지만 일반 관객들은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300만~400만 관객은 찾지 않을까 예상했다.
라=투자배급사 CJ엔터테인먼트는 내부적으로 1,000만 관객까지 기대했다는 말이 있다. 모니터 시사 결과가 좋았다는 소문이다. 설 대목 2주 전에 개봉한 것을 보면 자신감이 반영돼 있다.
고=복고의 인기라는 게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거라서 몇 년 전 불었던 쎄시봉 열풍이 전혀 도움이 안 됐다.
라=옛날 거라는 느낌을 두 번이나 줬다. 소재가 일단 옛날 것이고, 복고 열풍이라 화제가 된 게 이미 3,4년 전이다.
고=게다가 주인공이 쎄시봉의 실존 핵심인물이 아니다.
라=사람들이 쎄시봉의 숨겨져 있던 멤버에까지 관심을 둘까.
고=실화를 그렸다면 감정이입이 더 잘 됐을 것 같다. 캐스팅도 실패다. 정우와 강하늘이 아직은 티켓파워가 없다. 노래가 괜찮고 50~60대의 향수에 기대면 관객이 좀 들지 않을까 했는데 그들이 오히려 움직이지 않았다.
라=‘국제시장’이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흥행과 비교된다. 두 영화는 50~60대가 흥행에 큰 힘이 됐다. ‘쎄시봉’이 그 세대의 감성을 좀 더 직접적으로 건드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고=옷이랑 세트만 복고풍이고 시대가 잘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멜로가 됐다. 앞부분은 그나마 풋풋한 느낌이 있는데 뒤로 가면 말도 안 되는 신파로 변한다. 요즘 신파가 먹힐 것이라 판단한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앞에서 웃기고 뒤에서 울리면 된다는 강박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라=올드한 감성을 가진 관객을 자극을 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한테 배우 정우의 인지도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로 떴는데 30~40대가 열광한 드라마다. 겨냥한 관객층이 확실한 것 같으면서도 어정쩡한 느낌의 영화다.
고=요즘엔 20~30대만 노려서는 장사가 안 되니 10대부터 60대까지를 고루 겨냥해서 동그랗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시나리오에 좀 과도한 설정이 있으면 투자사가 빼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쉽고 간단한 영화를 요구한다고 하더라. 한 줄로 설명할 수 있는 영화, 금방 사람들에게 인식 시킬 수 있는 영화를 선호한다고 들었다. 여기에 맞춰서 제작사와 시나리오 작가가 튀지 않는 영화를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디어만 특이하고 흐름은 평범한 영화들이 나오는 듯하다.
라=최근 개봉한 ‘순수의 시대’나 ‘살인의뢰’도 그런 경향을 좇는다. 둘 다 자극적이긴 한데 단순하다. 소재는 자극적인데 이야기 전개방식은 너무 단순하다. 비교를 하면 ‘추격자’의 경우 잔인한 영화이면서 당대의 삭막한 사회상을 반영한다. ‘살인의뢰’는 잔인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깊이가 부족하다. 단순한 방식의 사법제도의 문제를 제시한다. ‘순수의 시대’도 숱한 사극들처럼 궁중암투를 배경으로 하는데 정작 궁중암투가 제대로 묘사가 되지 않는다. 야한 침실 장면과 거친 액션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암투에 휘말린 인간군상의 다양함을 보여주기보다 체위의 다채로움만 보여준다.
고=영화는 캐릭터가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익숙하고 뻔한 내용을 사건 위주, 볼거리 위주로 보여주니 흥미가 떨어진다. ‘강남 1970’도 너무 도식적으로 흘러간다. 캐릭터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라=볼거리와 사건에 몰두하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 있을만한 깊은 사연 묘사가 안 된다. ‘순수의 시대’나 ‘강남 1970’에서 섹스신을 한 두 장면이라도 덜어내고 과거회상 장면을 더 썼으면 설득력이 더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고=‘강남 1970’의 섹스신은 사건을 설명하거나 인물을 묘사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라=양념거리로 전락했다. ‘강남 1970’에 나오는 제비족의 활약상도 군더더기다.
고=불필요한 볼거리에 치중하는 게 거슬리더라. 요즘 그런 한국영화들이 많다. ‘국제시장’도 베트남의 폭파 신 등 그런 측면이 있다.
라=볼거리라도 좀 참신한 볼거리였으면 좋겠다. 클리셰의 연속이다.
고=영화가 점점 통계로 만드는 공산품이 되다 보니 뻔한 공식이 많이 쓰인다. 한국 관객들이 좋아한다고 여겨지는 ‘웃음 뒤 눈물’ 공식이 대표적이다. ‘허삼관’도 앞에서 많이 웃기고 뒤에서 울리는 전략을 노골적으로 취한다. 실상은 별로 울리지도 웃기지도 않았다. 최근 CJ 영화들인 ‘국제시장’ ‘오늘의 연애’ ‘쎄시봉’이 모두 같은 전략을 취한다.
라=관객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이 정도 보여주면 만족하지 않겠어’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허삼관’과 ‘국제시장’을 보면서 역사의 맥락을 따지지 않는 영화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시장’은 6?25전쟁 이후 역사들을 배경으로 하고 개인이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왜 개인이 역사랑 연결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관점이 없다. 힘든 역사 속에서 힘들게 산 개인의 사연만 있다. 그 안에서 웃기고 울리기만 한다. ‘허삼관’의 탈역사성은 더 문제다. 왜 주인공이 당시 매혈을 할 수밖에 없나 하는 내용이 없다. 사회적 맥락은 배제한 채 개인의 사연에만 몰두한다. 가난해서? 시대가 그런 시대여서?
고=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실재하지 않는 동화 속 이야기처럼 표현하고 있다. ‘허삼관’은 옛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예산을 초과했다고 한다. 현실과 역사를 밀착시켜서 사실감 있게 그려내는 데 신경 쓴 게 아니라 그저 볼거리만 우선시한 게 아닐까?
라=최근 본 한국영화는 중 그나마 희망 또는 참신함이 느껴진 영화가 있었나. 최근 2,3달 사이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영화적 힘이 느껴졌던 작품은 독립영화 ‘거인’이다. 그 이전에 ‘야간비행’과 ‘한공주’였다. 모두 주류 상업영화가 아니다.
고=나도 비슷하다. ‘한공주’와 ‘끝까지 간다’ ‘좋은 친구들’ 정도다. 아쉬웠던 영화는 ‘빅매치’다. 액션의 쾌감을 극대화시키는 영화였어야 하는데 액션도 그저 그랬고 캐릭터도 내용도 심심했다.
라=‘빅매치’는 원래 개봉 일정보다 당겨졌다고 하더라. 그래서 제대로 다듬을 새가 없었다고 한다.
고=중급 제작비 영화가 제일 심각한 것 같다. 자본의 영향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화들이 오히려 더 진부하다. ‘워킹걸’ ‘아빠를 빌려드립니다’ ‘내 심장을 쏴라’ 등 패기를 좀 보여줘야 하는 영화들이 그렇지 못했다. ‘끝까지 간다’ 같은 영화가 한 두 편 더 나와줘야 했다. 단지 투자사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라=충무로 빅4 투자배급사 중 대기업 계열이 3개(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이고 나머지 하나가 뉴(NEW)다. 뉴가 충무로의 새로운 엔진 역할을 해야 하는데 요즘은 대기업 계열과 큰 차이가 없다. 시나리오를 고르고 감독을 붙이고 배우를 캐스팅하는 모든 과정이 대기업 계열과 비슷하다. 일부에서는 더 심하다는 말이 나온다. 제3지대 역할을 해야 하는 뉴가 기존 질서에 너무 일찍 편입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고=시장에서 제작자들의 힘이 너무 약해진 것도 문제다. 요즘은 감독과 투자배급사가 직거래를 하니 제작사가 낄 틈이 없다. 제작자가 감독이 못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개성이 다 사라진다.
라=미우나 고우나 제작자가 감독과 같이 가야 하는데 그런 경우가 줄고 있다. 투자배급사들이 제작을 쉽게 하기 위해 스타급 유명 감독들을 스카우트 형식으로 계약을 하고 직거래를 하고 있다.
고=요즘은 영화아카데미 졸업생 중에서도 괜찮다 싶으면 투자배급사가 바로 스카우트를 한다. 대형 투자배급사가 자신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감독들을 육성한다고 할 수 있다. 감독과 투자사, 제작사 사이 힘의 균형이 무너진 게 큰 문제인 것 같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고경석기자 kav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