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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성장소설? 남아공의 영웅들을 만나다

입력
2015.03.1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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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의 ANC(아프리카 민족회의)가 권력 주도권을 쥐게 된 199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간 오랜 유혈 갈등의 지형 변화와 소비에트 와해의 이념적 격변까지 감당하게 된 남아공의 정치 사회 문화적 혼란기는 장르 문학의 기름진 토양이었을 것이다. 디온 메이어라는 작가의 스릴러 문학이 거기서 탄생했다.

1999년 데뷔했다는 디온 메이어의 2000년 발표작 ‘오리온(Orion-Dead at Daybreak)’과 03년 후속작 ‘프로테우스(Proteus-Heat of the Hunter)’가 동시에 번역돼 나왔다. 마약 보석 무기 밀매를 소재로 한 숱한 장르소설의 배경적 변방으로 값싸게 소비되던 아프리카의 여러 지명들, 예컨대 다이아몬드의 남아공 요하네스버거와 도시의 뒷골목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는 주 무대다. 문장도 유려하고 재미도 있다. 아프리칸스어 코사어 등의 현지 발음으로 표기된 고유명사들의 낯섦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날카로운 개성과 개연성 있는 얽힘으로 이야기의 긴장과 흥미를 넉넉히 유지한다.

‘오리온’은 쓰레기를 자처하는 한 전직 형사가 여성변호사의 사설탐정으로 고용돼 잔혹하게 살해된 남자의 도난당한 유서를 찾는 이야기다. 유서의 행방에 대한 탐문은 남자의 감춰진 신원과 피살의 사연으로 이야기의 지평을 확장해간다. 그렇게 사소해 보이는 사건은 15년 넘게 감춰졌던 음모와 범죄의 단서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거대해진다. 군 첩보당국의 석연찮은 개입과 경찰의 신경전, 미 CIA의 연루 의혹…. 경찰이 사실상 손놓고 있던 사건을 들쑤셔놓는 바람에 다각적으로 궁지에 물린 형사의 고투와 짠한 로맨스가 작품속 서사의 사생활이라면, 대륙의 광대한 스케일 속에 남아공 현대사의 한 고리와 얽히는 추리는 서사의 공식적 부분을 지탱한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대개의 좋은 추리소설이 그렇듯, 주인공인 자토펙 판헤이르던의 사연이라할 만하다. 유년의 성장사에서부터 대학 범죄학 교수직을 마다하고 엘리트 형사로 복귀했다가 돌연 사표를 내게 된 배경, 스스로를 쓰레기라 부르고 툭하면 주먹질을 일삼는 자학적 분노조절 장애, 삐걱거려온 연애의 내막…. 서사는 그 두 가닥, 즉 현재의 사건과 자토펙의 과거를 밧줄 엮듯 엮어 가는데, 작가는 과거의 사연이 현재의 근황을 떠받치고, 현재의 갈등을 과거의 사연으로 해명하면서 디테일들에 알리바이의 신뢰를 쌓아간다. 자토펙의 이야만 따로 놓고 읽으면 근사한 성장소설이라 할 수도 있겠다.

자토펙에게 유서를 찾는 데 주어진 시간은, 유산 증여에 대한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딱 일주일이다. 하루 단위로 진도를 내는 작품의 플롯은 소설의 긴장과 흡입력을 유지하는 장치 가운데 하나다. 후속작 ‘프로테우스’ 역시 디온 메이어의 또다른 주인공 ‘토벨라 음파이팰리’가 사흘의 시한 내에 부탁 받은 사소한 ‘심부름’을 수행해가는 과정의 서사로 채워져 있다.

디온 메이어의 대표작들. 왼쪽부터 '오리온' '프로테우스' '환상의 여자'.
디온 메이어의 대표작들. 왼쪽부터 '오리온' '프로테우스' '환상의 여자'.

600페이지 가량 되는 ‘오리온’의 후반부(약 400페이지쯤)에 ‘프로테우스’의 주인공 토벨라 음파이펠리가 등장한다. 거기서 토벨라는 자토펙을 돕는 비중있는 엑스트라이자 거물 마약상의 해결사다. 두 사람의 캐릭터는 사뭇 대조적인데 자토펙이 백인에다 FBI의 프로파일링 기법까지 교육받은 인텔리 출신 형사인 반면, 토벨라는 코사족의 전사 출신으로 10대때부터 ANC 조직원으로 활약하다가 KGB의 전문 암살요원 교육까지 받은 전설적인 킬러다. 그는 남아공 흑인정부가 들어서고 냉전이 종식된 뒤 범죄 조직조직에 잠깐 몸을 뒀다가 개심한 인물로 ‘프로테우스’에 등장한다. 주먹으로나 총으로나, 리 차일드의 잭 리처와 맞먹을 듯한 가공의 능력자인 자토펙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프로테우스’도, 풍문에 비해 위력은 맛만 보여줘 감질은 좀 나지만, 물론 읽을 만하다.

사실 ‘오리온’의 신원 반전 모티브는 흔하다. 최근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 ‘나를 찾아줘’)로도 소개된 줄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Gone Girl)’가 그랬고, 이달 초 나온 가뇨 료이치의 ‘환상의 여자’도 그렇다. 배우자 혹은 연인이 사라진(숨진) 대상을 찾다가 ‘숨겨진 진실’을 발견해가는 과정은 회상과 심리 묘사가 잦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디고 시시콜콜한 면이 없지 않다.(‘환상의 여자’는 정말 느긋한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반면 ‘오리온’은 거침 없고 단호하다. 심리에 천착하기엔 사건의 서서가 선명하고 굵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두 작품은, 아프리카 현지 작가여서 더 실감나게 담아낼 수 있을 아프리카의 개성(정서와 문화 등)과 아파르트헤이드 이후 남아공의 실상들을 비교적 충실히 보여준다. 다만 아프리카의 장쾌한 자연과 도시의 디테일들이 욕심에는 못 미친다. 초기작이어서 그런지, 작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미국 작가들(에드 맥베인, 존 맥도널드)의 그늘이 아직은 짙다.

아프리칸스 어로 쓰여진 그의 작품들은 미국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 28개국에서 번역돼 19개의 장르 문학상을 탔다고 한다. 2008년 ‘피의 사파리’ 2011년 ‘추적자’, 2007년부터 그리고 그의 간판 탐정인 듯한 ‘베니 그리설’ 시리즈…. 그의 후속작들이 번역돼 나온다면, 읽던 책을 덮고 그의 작품을 먼저 읽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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