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래퍼들 틈새서 무대 설 기회도, 대접도 박하지만
"진솔하게 모든 걸 쏟을 수 있어… 롱런하는 래퍼가 목표"
“어렸을 때 소리 내서 우는 방법을 몰라서 랩을 시작했어요.”
언더그라운드 힙합 세계에서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는 6년차 래퍼 최삼(24ㆍ본명 최지애)은 이렇게 말했다. 여성 래퍼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걸까. 왜 힙합을 하게 됐는냐고 묻는 게 우문이었을 것이다. 힙합은 그에게 삶의 이유이자 삶 그 자체였다.
비주류인 힙합 장르 안에서도 여성 MC(래퍼)는 극히 소수다. 전체 래퍼의 5% 정도가 여성으로 추정된다. 직설적이고 거친 장르 특성상 여성성은 별 장점이 되지 않는다. 남자 래퍼들에게 치여 빛을 보기도 어렵다. 힙합 세계에서 여자가 성공하는 일은 드물다. 국내에선 노래와 랩을 겸하는 윤미래가 유일하다. 그는 후배 래퍼들에게 넘고 싶은 장벽이기도 하다.
미국에 살았던 경험(제시, 졸리브이), 힙합을 좋아하는 친구나 형제(지민)를 통해 힙합에 빠지게 된 여성 래퍼들은 힙합동아리 같은 곳에서 랩을 시작하곤 한다. 얼마 전 데뷔 앨범을 낸 여성 래퍼 코카(25)는 “대학 때 교내 힙합동아리에서 취미로 랩을 시작해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다”며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힙합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정보를 공유한다”고 말했다. 치타 역시 “처음엔 혼자 정보를 찾아보거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빠져들었다”고 했다. 피아노나 기타, 성악을 가르치는 학원처럼 랩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은 흔치 않다. 졸리브이가 다니는 한국예술원(4년제 학점은행제 교육기관) 힙합과와 사설 학원들이 랩을 배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들이다. 한 달에 수십 만원을 내고 기성 래퍼에게 레슨을 받는 경우도 있다.
여성 래퍼들에겐 무대 기회가 제한적이다. 이름 있는 남성 래퍼를 제치고 일부러 여성 래퍼들을 부르는 곳은 드물다. 코카는 “최근 들어 불러주는 곳이 많아지긴 했지만 출연료는 여전히 제자리 수준”이라고 했다. 인기 래퍼는 한 차례의 공연에 몇 백만원을 챙기지만 무명 래퍼들은 언감생심이다.
공연기회를 잡지 못하는 여성 래퍼들은 삼삼오오 길거리 공연을 하거나 돈을 모아 대관해 공연하는 게 고작이다.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는 기존 비트에 랩을 녹음해 무료 배포하는 ‘믹스테이프’를 활용한다. 최삼과 코카도 여러 개의 믹스테이프를 온라인에 발표한 뒤 지난해 각각 데뷔 싱글과 앨범을 냈다.
어떤 장르보다 남성우월주의가 심각한 셈인데, “여자 래퍼들이 무시당하는 것은 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냉정한 평가도 있다. 한 여성 래퍼는 “국내 여성 래퍼 중에선 본 받을 만한 사람이 윤미래밖에 없어서 그를 따라하다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못 찾고 길을 잃는 경우도 종종 봤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이 언니들이 랩에 사로잡힌 이유는 무엇일까. ‘표현에 대한 열망’이라는 점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 “스무살이 되기 전까진 살고 싶지 않았는데 힙합을 시작하면서 마음 속에 있는 걸 털어놓고 살 수 있게 됐다”는 최삼은 그 극단에 있다. 그는 “힙합을 하면서 내가 행복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치타는 “가식을 벗고 내 이야기를 진솔하게 할 수 있어서” 랩을 한다고 말했다. 결국 래퍼들은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걸 쏟아내고 싶어서” 힙합을 선택한다. 마음 속에 담은 말을 후련하게 내뱉으면서 박수받을 수 있는 자리가 흔치 않은데, 할 말 많고 기가 센 이 여자들에겐 예쁘게 노래 부르는 것으론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 래퍼들이 바라는 한결 같은 목표는 TV 스타가 아니라 오래도록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다. 졸리브이는 “롱런하는 래퍼가 되는 것이 목표”라며 “긍정적인 기운을 퍼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릴샴 역시 “여성 래퍼가 오래 활동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오래도록 힙합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언프리티 랩스타’를 기획한 한동철 엠넷 국장은 “힙합이라는 장르에 여자가 별로 없어 아직 저변이 넓진 않지만 정말 잘하는 여성 래퍼들이 많다는 걸 이 프로그램을 통해 계속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고경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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