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스포츠 산업화 속 스포츠와 디자인의 결합은 선택이 아닌 필수. 경기라는 상품을 어떻게 포장해 내놓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무궁무진해집니다. 총 10회에 걸친 '스포츠, 디자인을 입다' 기획을 통해 한국 프로스포츠의 가치를 높인 사례를 조명합니다.
“저 ‘We Ansan!’ 슬로건의 앞 두 음절이 ‘위안’을 의미한다는 거 아셨어요?”
프로배구 안산 OK저축은행의 시즌 마지막 주말 홈경기가 열린 3월 21일. 가족들과 함께 상록수체육관을 찾은 김현우(36 ·경기도 안산) 씨는 체육관에 걸린 대형 현수막을 가리키며 던진 기자의 질문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그런 뜻까지 있었을 줄은 몰랐다”고 말을 이은 그는 “구단이 안산 지역에 그렇게까지 신경 쓸 거란 생각은 못했다”며 “시민으로서 고맙고 뭉클하다. 앞으로 성적이 나지 않더라도 계속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응원이 전해졌기 때문일까. 5세트까지 가는 접전이 펼쳐진 이날 경기에서 OK저축은행은 믿기 힘든 저력을 발휘하며 첫 승을 챙겼다. 한국전력을 넘고 챔피언 결정전까지 거침없이 내달린 OK저축은행은 만우절인 4월 1일, 기어코 ‘독재자’ 삼성화재를 상대로 챔피언 결정전 3승째를 챙기며 창단 2년만의 우승을 일궈냈다. 거짓말 같은 우승이었다.
●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프로배구 막내구단 OK저축은행의 안산 정착기는 눈물겨웠다. 대부업체인 ‘러시앤캐시’의 이름을 달고 배구판에 뛰어든 OK저축은행과 안산시의 첫 시즌 동거는 불완전했다. 당초 배구단 유치 경험이 있는 지방의 한 중소도시가 유력한 연고지로 검토됐지만, 대부업체의 부정적 이미지 탓에 거절당했다. 결국 차선책으로 안산 상록수체육관을 최초 1년간 대관해 활용하는 방법을 택했고, 그 1년간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2014년 3월 20일 정식 연고협약을 체결했다.
어렵게 연고 협약식을 치르니 지난 1년의 마음고생은 몽땅 사라졌다. 구단 직원들의 의욕은 불타올랐고, 김세진 감독과 선수들의 사기도 올랐다. 모두가 ‘이제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연고협약을 치른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4월 16일 새벽, 믿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4명을 포함 476명의 탑승객을 태우고 인천항을 떠나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이 사고로 295명이 사망했고, 실종자 9명의 시신은 1년이 다 된 지금까지 수습되지 못한 상태다.
악재도 그런 악재가 없지만 ‘악재’라는 단어조차도 꺼낼 수 없는 참담한 사건이었다. 대한민국 전체가 슬픔에 잠겼다. 단원고의 소재지인 안산 지역의 침통함은 말 할 것도 없었다. 자연히 안산시와 함께 추진했던 모든 홍보와 마케팅은 올 스톱 됐다. OK저축은행 관계자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구단 운영에 대한 어떠한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 ‘We Ansan!’ 광고 버리고 메시지를 입다
다 내려놓으니 아무런 기반 없이 배구판에 뛰어들었던 1년여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초심으로 돌아간 직원들은 어떤 행위에 대한 효과를 계산하기보다 ‘기본’을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안산 팀이니 안산의 정서를 공유하는 일, 프로구단이니 이기는 일이 우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심 끝에 꺼내 든 건 눈에 띄는 홍보나 마케팅 전략이 아닌 ‘진심 어린 메시지’였다. OK저축은행은 2014 KOVO컵 개막을 앞둔 7월15일 ‘We Ansan!’ 슬로건을 발표했다. 글자 그대로 ‘우리는 안산이다’라는 의미지만 앞의 두 음절인 ‘We An’은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슬픔에 잠긴 안산시민들에게 ‘위안’을 주겠다는 속뜻이기도 했다. 이 슬로건을 담은 노랑색 홈 유니폼에서 광고는 모두 뺐다. 그만큼 순수한 마음으로 안산 시민들에게 위안을 안기겠다는 뜻이었다. OK저축은행 장재홍 구단지원팀장은 “자칫 세월호의 아픔을 이용한다는 비판도 있을 수도 있어 슬로건의 속뜻에 대한 홍보는 하지 않았지만, 때론 의미를 알아채고 되묻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OK저축은행의 이 같은 시도에 대해 KOVO 김대진 홍보마케팅팀장 역시 “진심이 통했다고 본다. 타 구단들이 본받을 만한 아주 좋은 사례”라고 평가했다. 김 팀장은 “광고를 빼고 슬로건을 내건 일은 정말 멋진 생각이었다”며 “다른 구단들의 노력도 많았지만, OK저축은행이 연고 정착을 위해 더 많은 노력과 고생을 쏟은 건 배구계에선 다 알만한 사실”이라고 전했다.
● ‘위안’· ‘기적’ 얘기한 속 깊은 막내
진심이 통했을까. 2014~2015 시즌이 개막하자 구름 관중이 몰리기 시작했다. 흥이 나니 성적도 뒤따랐다. 개막 3연승을 포함해 8경기에서 7경기를 이겼다. 2015년에 들어서는 창단 후 최다연승인 8연승을 기록했다.
일찌감치 플레이오프 진출에 훌쩍 다가선 OK저축은행은 2월 초 ‘기적을 일으키자’라는 새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디자인의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구단은 “프로배구 진출 2년 차에 우승 기적을 일으키자는 의미”라고 알렸지만 그 속에도 세월호 침몰 후 아직까지 인양되지 못한 실종자 9명의 가족들을 향한 ‘기적’의 염원이 녹아있었다.
김세진 감독 역시 가슴 한 켠에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과 안산 시민의 아픔을 품었다. 김 감독은 시즌 동안 가진 수 차례의 인터뷰에서 “좋은 성적을 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며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안산 시민들에게도 상록수체육관만큼은 치유의 공간으로 다가온 듯했다. 경기장 밖에선 인터뷰에 응하기를 꺼려했던 시민들도 경기장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거듭 인터뷰를 거절하던 한 시민은 “아직까지 안산은 슬픈 도시”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는 “도시 내에서 시민들이 모여 마음껏 기쁨을 표현하고 환호를 지를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었다”며 “그나마 배구장이 그 기능을 하고 있고, 구단에서도 시민들을 많이 생각해주는 것 같아 위로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축구장으로 번진‘위안’의 메시지
지난달 초 한국을 찾은 스포츠 브랜드 험멜의 소렌 슈라이버(60·덴마크) 대표는 대화 도중 “왜 한국 프로축구팀들은 세월호 사건 때 어느 팀도 위로의 메시지를 담은 유니폼을 입지 않았느냐”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스포츠 팀들이 다양한 수단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보듬고 큰 사고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문화가 보편화 된 해외 사례들과 대조 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에선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많은 국내 구단들이 노란 리본을 달고 경기에 나섰으나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 이뤄지지 않은 점은 분명했다.
하지만 OK저축은행의 이 같은 시도 이후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배구 코트에서 시작된 이 메시지가 새 봄이 오자 축구 그라운드로 번진 것. K리그 챌린지(2부 리그) 안산 경찰청 축구단도 이번 시즌부터 유니폼 전면에 스폰서 광고 대신 ‘We Ansan!’ 슬로건을 새겨 넣기로 했다. 안산 경찰청 관계자는 “배구 시즌이 끝나도 축구장에서 ‘위안’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올 시즌 안산 경찰청의 메인 스폰서인 NH농협은행은 이 같은 구단의 뜻에 흔쾌히 동의하며 유니폼 전면 자리를 양보했다. 구단 관계자는 “연고지 시민들과 기쁨을 만드는 것도 우리의 몫이지만 슬픔을 나누고 힘이 되는 것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며 “올 시즌엔 시민과 더 많이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진심은 통했다. 지난 3월 29일 충주 험멜과의 홈 개막전이 열린 안산와스타디움에는 10,094명이 경기장을 찾았다. 종전 최다 관중 기록인 3,568명(2014년 03월 23일)을 훌쩍 넘은 수치였다.
안산=김형준기자 mediabo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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