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스포츠 산업화 속 스포츠와 디자인의 결합은 선택이 아닌 필수. 경기라는 상품을 어떻게 포장해 내놓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무궁무진해집니다. 총 10회에 걸친 '스포츠, 디자인을 입다' 기획을 통해 한국 프로스포츠의 가치를 높인 사례를 조명합니다.
“국내 어느 경기장을 가봐도 이런 인테리어를 볼 수 없었습니다. 감독인 제가 봐도 흐뭇하고 기뻤죠. 우리 선수들의 마음가짐이 다른 팀 선수들과 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꼭 우리의 경기가 이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느낌입니다. 작은 변화지만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시즌부터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의 사령탑을 맡은 김도훈(45) 감독은 홈 구장인 인천축구전용구장의 라커룸에 처음 들어선 순간의 감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선수 시절 K리그는 물론 국가대표까지 거치며 전 세계 수많은 경기장 라커룸을 이용했던 김 감독이 본 광경이 어땠기에 이 같은 찬사가 나왔을까.
● “라커룸 들어서는 순간부터 미소가”
인천 유나이티드가 새롭게 단장한 라커룸을 공개했다. 라커룸 내벽은 구단 상징색인 푸른색 바탕에 검정색 세로 줄을 넣어 세련미를 더했다. 중앙 바닥면에는 엠블럼은 새겨 넣어 선수들에게 팀에 대한 자긍심을 불어넣었다.
포인트는 개인 사물함을 비추는 LED 조명이다. 선수 개개인의 유니폼을 비추게 될 푸른 형광 조명을 본 이천수는 “라커룸이 선수들과 같은 홈 유니폼을 입고 같이 시합을 준비 하는 것 같다”면서 “락커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미소가 번진다”고 말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구단은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설 때까지 거칠 모든 공간에 다양한 메시지를 담았다. 트레이닝 공간에는 구단의 비전인 희망(hope) 신뢰(trust) 감동(touching)을 새겨 넣었고, 감독실에는 초대 감독이었던 베르너 로란트(독일) 감독부터 신임 김도훈 감독까지 모든 사령탑의 사진을 걸어 하나의 '작은 역사관'으로 만들었다. 구단 측은 선수단 탈의실 외벽도 같은 컬러로 디자인해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그 감흥이 이어지도록 고려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무대를 경험했던 이천수는 "유럽에서도 보기 드문 실내 디자인"이라고 말했다.
국내 프로스포츠에서 ‘선수들만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라커룸 인테리어에 공을 들이는 일은 드물다. 한 축구 관계자는 “라커룸 본연의 기능 외에 활용 할 만한 일이 많지 않은 탓”이라며 “기회비용을 따져보면 같은 돈을 마케팅 등 다른 쪽에 투자하게 되는 게 보편적”이라고 말했다.
라커룸을 새 단장하고자 마음 먹더라도 실행 과정이 쉽지 않다. 대다수 구단이 홈 구장 운영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지어진 구장들과 공설운동장들의 운영권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시설관리공단 또는 지자체가 가지고 있다. 경기장에 손을 대기 위해서는 복잡한 행정적 절차가 발목을 잡는다.
인천의 경우 2012년 새로 개장한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의 운영권을 구단이 위탁 받은 흔치 않은 사례다. "타 구단에 비해 우리의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기 좋은 환경인 건 분명하다"고 밝힌 인천 관계자는 “경기장만 놓고 보면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곳에 더 많은 스토리를 채워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라커룸 새 단장의 이유를 전했다.
●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된 경기장들
해외 명문 구단들에게 홈 경기장은 구단 수익 구조의 커다란 축을 맡는 콘텐츠다. 구단마다 홈 구장의 내부 공간에 디자인을 더해 다양한 스토리가 담긴 체험 상품으로 내놓고 있다.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마드리드를 찾은 스포츠팬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여행코스가 됐다. 성인 1인당 19유로(우리 돈 약 22,000원)라는 적지 않은 입장료를 매겨놨지만, 하루 수 천명 이상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콘텐츠도 풍부하다. 수많은 트로피 및 사진 전시로 ‘구단 역사관’을 꾸몄고, 레알 마드리드를 빛낸 레전드의 스토리와 엠블럼 변천사를 전하는 전시 공간도 갖췄다.
이곳 역시 라커룸에 공을 들였다. 관람객들의 발걸음은 선수 개인별 사진과 이름이 새겨진 라커룸에서 가장 오래 머문다. 입장객들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0)가 축구화를 동여매던 자리에 앉아 멀쩡한 신발 끈을 풀었다 묶어 매며 즐거워한다. 이와 함께 스파 시설이 갖춰진 샤워 공간은 물론 벤치와 기자회견실 등 구장 내 모든 곳이 색다른 체험 공간으로 활용됐다.
특히 스타디움 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유니폼 및 구단 머천다이징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이다. 이곳을 찾은 한 국내 관광객은 “그 곳에서만 수십만 원을 소비했을 정도로 매력적인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레알 마드리드 외에도 라이벌 구단 FC바르셀로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첼시·아스널·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 명문 클럽들도 스타디움 투어 프로그램으로 수익을 내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도 마찬가지. 후쿠오카 시에 위치한 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홈 구장 '야후 돔'의 백 스테이지 투어(backstage tour)는 후쿠오카 관광의 필수 코스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곳 역시 1인당 1,000엔(우리 돈 약 9,000원)의 입장료를 내면 구장과 관중석은 물론 선수단 라커룸과 기자회견장 등을 체험할 수 있다. 경기장 투어는 이처럼 홈 경기가 없는 날에도 꾸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 ‘비(非)영업일’ 340일을 위한 구상
아직까지 국내 프로 구단들에겐 언감생심이다. 국내 스포츠산업 규모를 비춰볼 때 수익 창출은커녕 시도 자체도 부담스럽다. 그나마 서울시설관리공단과 대한축구협회가 함께 운영하는 서울월드컵경기장 투어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지만 수익성을 논하기는 힘든 단계다.
서울시설관리공단에 따르면 성수기 기준 하루 평균 입장객은 1,000명 수준인데다, 이 중에서도 80%가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다. 성인 1인당 입장 단가가 1,000원이고 단체관람객에게 30%의 할인 금액이 적용되는 점을 감안하면 실적은 미미하다. 국내 프로구단 관계자의 의지도 이 대목에서부터 꺾인다.
하지만 인천의 생각은 달랐다. 이번 라커룸 새 단장을 주도한 이진택 인천 홍보마케팅 팀장은 "이 작업에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앞서 이천수의 생각처럼 선수단의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되지만, 더 나아가서는 ‘잠재 고객’인 인천 지역 어린이와 학생들의 체험 공간으로의 활용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인천의 고민은 1년 중 홈 경기 개최일을 제외한 약 340일의 '비(非) 영업일'동안 경기장을 활용하고자 하는 뜻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던 중 지난해 인천 지역 유치원생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전 예약을 받아 진행한 경기장 체험 프로그램의 반응이 정말 좋았던 점을 떠올렸다.
“경기장이라는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적 가치를 채워 가는 과정”이라고 밝힌 이 팀장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경기 관람 공간뿐만 아니라 이동 통로, 팬 라운지 등 경기장 내 곳곳을 디자인 해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이 같은 구단들의 세심한 노력을 반겼다. 인천축구전용구장의 설계를 맡았던 스포츠경기장 건축설계 전문기업 로세티의 정성훈 이사는 “완성형 경기장은 애초에 없다”며 “경기장을 운영하는 이들이 스토리와 트렌드를 반영해 완성형에 가깝게 만들어 나가는 방향이 옳다”고 짚었다.
인천=김형준기자 mediaboy@hk.co.kr
조한울 인턴기자 (한양대 영어영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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