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필드에 열린 '에덴 동산'… 탈도시 환경 추구하며 정착
한줌이라도 스스로 생산해 보고 최선을 실천하는 것이 해법
퍼머컬쳐(Permaculture)는 ‘영속하다’의 ‘Permanent’와 농사의 ‘Agriculture’를 합친 말이다. 영구농업 영속농업쯤으로 번역되는 저 용어는 1970년대 말 호주 타즈매니아 대학의 빌 몰리슨(Bill Mollison)과 데이비드 홀름그렌(David Holmgren) 교수가 쓰기 시작한 이래 환경과 농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꽤 친숙한 낱말이 됐다. 퍼머컬쳐는 생태농업의 한 갈래로, 생태계를 모델로 농사 공간을 디자인함으로써 자연 에너지와 유기체의 상호작용을 통해 농작물과 가축 등이 생장하게 하자는 농법이자 운동이다. 이를테면 퍼머컬쳐의 농부는 봄마다 땅을 일궈 이랑을 만들지 않고 씨앗이나 모종을 심지도 않는다. 화학비료는 물론 부엽토나 유기 거름으로 지력을 돋우지도 않고, 약초 효소를 만들어 농약 대신 뿌리지도 않는다. 나무와 관엽식물 초본 식물이 어우러진 자연의 숲이 인간의 개입 없이도(아니 개입하지 않아야) 해마다 싹을 틔워 열매를 맺듯이,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이 그런 숲(혹은 정원, 혹은 과수원)을 이루게 디자인해 농사를 짓는 방식이다. 자연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에서 퍼머컬쳐는 가장 게으르고 가장 근본적인 자연 농법의 한 형태다. 농사뿐 아니라 집 건축에서부터 마을 배치에 이르는 전체를 자급 자족이 가능한 단위 공동체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총체적인 생태 대안 운동이기도 하다.
생태농업 전반에 대한 관심은 196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커져왔다. 농업의 산업화와 함께 전통 기술과 가치의 전복이 본격화하면서 그 반작용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수질과 대기ㆍ토양 오염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하면서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일부 국가에 환경부가 설립되고 생태 정당이 등장하는 것은 70년대 들면서부터다. 물론 땅과 유기농업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초부터 이어져왔지만, 환경보다는 종교나 사상 정치적 신념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했다.
퍼머컬쳐 농법은 호주와 유럽을 시작으로 1980년대 이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일부 국가로도 전파돼 국내에도 충남 홍성의 풀무학교와 정농회 등 단체들이 앞장서 소개해왔다. 다만 몰리슨의 연구가 개념적 성격이 강한 데다 호주의 환경적 특성에 특화한 한계가 있었다. 퍼머컬처는 해당 지역의 기후와 지형, 토양, 주요 작물 특성 등 여러 변수들에 대한 지식과 실험 등 결코 간단치 않은 난관들을 돌파해야 한다. 퍼머컬쳐가 상정하는 소규모 영농이 인류 식량 수급의 대안적 모델일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의문도 확산의 장애였다.
영국인 패트릭 화이트필드(Patrick Whitefield)는 몰리슨 등의 저 개념을 가장 모범적이고 창조적으로 구현한 농부이자 유럽 퍼머컬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1983년 구입한 잉글랜드 남서부 서미싯주의 너른 건초밭을 10여 년 만에 근사한 ‘에덴 동산’으로 탈바꿈시켰고, BBC등 방송에 출연해 사철 먹거리로 풍성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자신의 정원을 일삼아 자랑하곤 했다. 여러 권의 책과 활발한 강연으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유럽과 대륙 바깥으로 전파했고, 그럼으로써 인류가 미래를 위해 택할 수 있는 길 한 갈래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그는 확신에 찬 생태농업의 투사라기보다 온건한 낙관주의자였다. 그는 스스로 이룩한 바 높은 기대와 기준으로 인류의 농업이 재편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그렇게 되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이 추구한 삶의 양식이 ‘문제’의 일부가 아니라 ‘해법’의 일부이기를 희망했다. 평생 일군 자신의 낙원을 2008년 자연보존기구인 ‘서머싯 야생 트러스트(Somerset Wildlife Trust)’에 기탁한 그는 ‘Patrick Whitefield Associates’라는 단체를 설립해 말년을 퍼머컬쳐 교육 및 디자인 컨설팅에 헌신했다. 그가 2월 27일 별세했다. 향년 66세.
패트릭 화이트필드(본명 Patrick R. Vickers)는 1949년 2월 11일 영국 월셔주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밭에서 자라며 자연스레 농사를 익혔고, 베드퍼드셔의 셔틀워스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줄곧 좋은 농부가 되는 게 꿈이었다지만(가디언, 2015.3.16), 뻔한 농사꾼이 되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대학 졸업 후 중동과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농사를 체험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테다. 그 시절 얻은 브루셀라병 후유증으로 그는 평생 건강 문제를 안고 살았지만, 병 때문에 위축되지는 않았다.
귀국 후 서머싯에 정착한 화이트필드는 버틀레이(Butleigh) 인근의 목초지 ‘화이트필드’를 구입, 무려 8년 동안 인디언 텐트 티피에서 기거하면서 짚풀을 엮어 공예품을 만들거나 티피를 만들며 생계를 이었다. 그의 유별난 청장년기 생활은 건강 탓도 있었겠지만 기질적인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는 영국 생태당(Ecology Party, Green Party의 전신)의 원년 당원이자 활동가였으나 떠들썩한 자연주의자도 아니었다. 정치나 이념에 앞서 다만 자연이 좋아서 그 속에 머물렀고, 봄 여름 철 따라 바뀌는 화이트필드의 풍광과 들꽃들을 즐겼다. 그러니 그는 농사 자체보다 농사를 통해 얻게 되는 삶의 양식, 이를테면 탈도시적 환경을 추구했던 걸지 모른다. 밭이 아니라 풀밭을 구입한 의도도 농사를 짓겠다는 뜻보다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며 깃들이겠다는 거였다고 한다. 당시의 체험을 그는 87년 이라는 제목을 달아 책을 펴냈다. 자신의 성을 ‘화이트필드’로 바꾼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는 혼자 집 짓고 자급하며 익힌 경험과 기술들이 훗날 퍼머컬쳐 농부로 사는 데 큰 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장 기름진 거름은, 화이트필드의 땅과 풀과 변덕스러운 날씨를 익혔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물이 어디서 들어와 어디로 솟고,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느 땅이 찰 지고 어디가 거친지 제 손바닥 지문 보듯 들여다봤다.
퍼머컬처 관련 서적과 강좌를 들으며 직접 그 세계를 구현하고자 나선 것은 티피 8년의 후반기부터였다. 그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혼자 자신의 화이트필드를 디자인했고, 1990년 결혼한 뒤로는 아내(Cathy Lowenstein)와 함께 그 일을 했다. 그리고 모든 과정을 책으로 펴냈다. 퍼머컬쳐 개론서이자 가장 모범적인 적용 사례집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93) (96)은 지금도 ‘유럽 퍼머컬쳐의 바이블’로 꼽힌다.
방송과 유튜브 등 동영상에 소개된 그의 정원은 언뜻 봐서는 게으른 농부의 텃밭이나 산만한 잡목림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바닥에는 허브와 케일 등 다양한 일년생 다년생 채소들이 들풀들과 어울려 자라고, 관목 더미 사이에는 베리류 등 작은 열매들이 푸지게 숨어 있다. 나무에서는 다양한 과일과 호두가 열린다. 그는 자신의 뜰을 ‘kitchen garden(부엌 정원)’이라 불렀고, 나무가 자라는 경사진 자리는 ‘Forest Garden(숲 정원)’이라 불렀다.
그의 정원들은 땅 속 미생물에서부터 가금류까지, 토질과 지형, 물과 바람과 빛까지 모든 요소들의 연계와 상호작용을 최대한 배려하는 퍼머컬처의 기획에 따라 정교하게 배치된 결과다. 어떤 작물을 이웃해 심으면 병해충에 강한지 살피고, 각각의 선호에 따라 마른 땅 진 땅을 골라 씨를 뿌려둔 게 그가 들인 노동의 큰 부분이었다. 나머지는 저들 스스로 피고 지고 씨앗을 뿌려가며 점차 우거져갔을 것이다.
자연이 일구는 퍼머컬처는 산업화한 대규모 기업농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농사법이다. 한 줌 두 줌 손으로 수확해야 하는 만큼 단위노동 생산성은 기업농에 댈 수 없고, 당연히 경제성도 떨어진다. 하지만 단위면적당 생산성은 월등히 앞선다. 물론 가장 큰 장점은, 기업농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들 즉 지력 저하를 비롯한 토지 수질 오염이 없고 청정한 먹거리를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화석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기 때문이다.
생태농업의 다양한 농법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 각각의 방식들은 서로의 장점을 채택하고 응용하면서 더불어 진화해왔다. 하지만 개중에는 아직 신비주의와 반문명의 이념적 색채가 짙은 생태원리주의적 방식도 있고, 일면적인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한 농법도 있다.(음악을 들려주며 재배한 농작물 운운이 그 예일텐데, 전력 소비에 대한 해명은 없다.) 창세기나 요한계시록, 동학의 어느 구절을 절대선처럼 앞세우며 배타적 우월성으로 무장한, 컬트적 운동도 없지 않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화학비료와 농약이 자연에 끼친 여러 해악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인류를 기아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측면까지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가치론적인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종자를 독점한 다국적 기업이 생산 유통채널까지 통제하는 현실과 별개로, 지구의 남과 북에 기아와 잉여 농산물이 혼재하는 현상 등 국제 정치와 세계 자본주의의 문제들까지 생태와 환경의 문제로 치환해서 해법을 구하려는 발상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패트릭 화이트필드는 ‘The Land Magazine’(2013년 여름호) 인터뷰에서 “궁극의 대답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농업의 문제는 거대하지만 해법은 의외로 작고 소박하다. 우리 각자가 최선이라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나는 퍼머컬처가 기업농을 포함한 현재의 모든 농법을 극복하고 아우르는 압도적인 농법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농업은 미래에도 지금처럼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혼재된 채 이뤄질 것이다. 다만 나의 실천이 개인으로든 퍼머컬처로든, 선한 자리에 놓이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말했다. (2004)이란 책에 그는 이렇게 썼다. “만일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면 병든 지구를 치유하고 지속 가능한 공간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헛된 희망일까? 저 거대한 질문에 우리가 정말 정직하고 냉정하게 답한다면 우울한 결론을 내려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에 저 질문은 틀렸다. 미래는 누구도 모르는 것 아닌가. 나라면 ‘지금 내 삶이 어떠하기를 원하는가?’라고 묻겠다.(…) 내 대답은 ‘내 삶이 문제의 일부가 아니라 해법의 일부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2011년 ‘Transition Glastonbury’ 인터뷰에서 ‘해법의 일부’가 되는 삶이 어떤 거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모두가 다 다를 것이다. 다만 핵심은 각자가 식량 생산의 기적을 체험해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생산한 게 한줌에 불과하더라도 전혀 생산해보지 않은 것과는 정서적 물리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지닌다.”
화학비료와 농약에 대한 변호의 이면에는 퍼머컬쳐(혹은 생태농업)가 영국을(혹은 세계를) 먹여 살릴 수 있느냐는 질문(반박)이 깔려 있다. 그는 “현재의 농법이 영원히 영국을 먹여 살릴 수 있느냐”는 반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화석에너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현재의 농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뭔가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의 화이트필드는 변화의 필요성은 늘 인정하면서 변화의 시도들에 저항할 근거를 찾는 데 더 열성인 이들의 위선에 대한 나직하고 격조 있는 대답이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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