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주년 맞아 유족 200여명 사고해역 찾아
세월호 참사 1년을 하루 앞둔 15일 오전 전남 진도군 팽목항을 출발해 동거차도 인근 해역으로 향하는 ‘한림 페리5호’ 선내. 단원고 학생이던 고 이재욱군의 엄마 홍영미(47)씨는 조용히 1년 전 오늘을 떠올렸다. 2교시만 마치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며 들뜬 표정으로 짐을 챙겨 집을 나선 재욱이는 하필 속옷을 빼먹었다. 홍씨는 부랴부랴 속옷을 챙기고 음료수와 과자, 멀미약을 사 학교에 들렀다. 거기서 마주한 재욱이의 얼굴과 목소리가 이 생에서 마지막이었다. 참사의 전조였을까. 세월호가 가라앉은 다음날 새벽 왼쪽 머리가 깨지는 아픔 속에 홍씨는 잠에서 깼다. 뒤척이다 출근한 홍씨는 사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전화를 했지만 아들 재욱이는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고 8일만에 시신으로 돌아온 재욱이의 왼쪽 이마에도 무엇인가에 찍힌 상처가 나 있었고, 그걸 본 홍씨는 다시 한번 무너져 내렸다. 그 참척의 고통을 겪은 지 어느덧 1년이 됐다.
이날 한림 페리5호에는 새벽2시 넘어 관광버스 6대에 몸을 싣고 경기 안산을 출발해 전남 진도에 도착한 세월호 희생자 가족 200여명이 타고 있었다. 홍씨도 그 속에 있었다. 그 누구도 차가운 바닷속에 잠긴 아들을, 딸을, 가족을 기다리며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내야만 했던 지난해 이맘때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푸른 생명들이 마지막으로 살아 숨쉬던 사고 해역을 찾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보름 만에 아들 조봉석군을 찾은 송모(49)씨는 “다시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이번에 안 오면 후회할 거 같아서…”라고 말끝을 흐렸다.
엄마 아빠들은 불과 한 달 반 남짓 같은 반이었던 아들, 딸들보다 사고 이후 더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됐다. 이들은 동거차도로 가는 선상에서 삼삼오오 모여 길지 않은, 그러나 끝나지 않을 얘기꽃을 피웠다. 지난해 처음 단원고로 전근 온 고2 자녀를 둔 담임 선생님 이야기부터 사고 후 아들이 다니던 학원에 한 반이 통째로 없어졌다는 얘기까지 관심사는 여전히 내 딸, 아들이었다.
자녀가 좋아하는 것을 챙겨 온 부모들도 있었다. 단원고 박수찬군의 엄마는 생전 수찬이가 좋아했던 치킨 열 조각과 김밥을 싸 왔다. “한창 많이 먹을 땐데 열 조각이 뭐냐”며 타박하는 제훈이 아빠 김기현(50)씨의 말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추임새 같은 말이었지만, 일순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 준비해 올 생각을 미처 못한 엄마들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스쳤다. 꽃을 좋아하던 딸 생각에 팽목항 주변에 핀 들꽃을 꺾어 배에 오른 박예슬양의 엄마 노현희(44)씨는 “딸이 이 꽃을 보면 좋아할 것 같다”고 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내 새끼 잡아먹은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았는데”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팽목항을 떠나 한 시간여 지나 사고 해역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가족들은 굳은 얼굴로 하나 둘 선상으로 나왔다. 멀리 보이던 세월호 침몰 해역을 나타낸 노란색 부표가 점점 가까워지자 이곳 저곳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족들은 희생자를 기리는 묵념 뒤 예은이 아빠 유경근 4ㆍ16 세월호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의 선창에 따라 실종자 9명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국화꽃과 노란 종이배가 점점이 바다 위로 던져졌다. 실종자 가족 중 유일하게 배에 오른 허다윤양의 언니 서윤(20)씨는 꽃다발 속에 “보고 싶다. 빨리 돌아와”라는 내용의 편지를 종이배 모양으로 접어 바다에 던졌고, 이모는 “다윤아, 빨리 돌아와. 엄마가 많이 기다려”라며 오열했다. 이름 모를 학생들의 엄마들도 “우리 새끼, 보고 싶다”며 자식 이름을 목놓아 부르짖었다. 엄마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자 착잡한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던 아빠들의 눈 주변도 빨갛게 물들었고 이내 소리 없이 두 뺨에 눈물이 흘렀다. 유가족은 손을 모아 기도하거나 슬픔을 못 이겨 발을 구르기도 했다.
다시 팽목항으로 돌아오는 배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지금까지 버텨온 힘이 다 빠진 듯 엄마들은 주저앉았고 선상에 남은 가족들은 말없이 멀어지는 사고 해역을 망연자실 바라봤다. 일주일 전 팽목항에 내려와 분향소에서 생활해온 김모씨는 “그 동안 아무 것도 못해 딸에게 죄스럽다. 내가 죽어야 정부가 움직이고 세월호가 인양된다”며 갑자기 바다에 투신을 시도하려다 주변 가족의 만류로 안정을 찾았다. 사고 해역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눈을 떼지 못하던 상준이 아빠 지용준(47)씨는 “애비가 돼서 아무 것도 못해줬다”며 한숨을 지었다.
이날 오후 팽목항에서는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렸다. 오전에 사고 해역을 찾은 가족 200여명과 오후에 도착한 나머지 유가족 200여명이 함께 모여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 폐기, 실종자 수색과 진상규명을 위한 조속한 선체 인양을 촉구했다. 유경근 위원장은 “오늘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종자 9명을 찾고 명확한 진상규명을 하기 위한 ‘팽목항 사고 해역 인양촉구 위령제’”라고 말했다. 행사는 희생자들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아 천을 갈라 세월호의 가는 길을 밝히는 ‘배 가르기’ 퍼포먼스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위령제 내내 가족들은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행사에 참가한 세종국제고 1학년 금신정(16)양은 “희생자 수가 단순한 숫자로만 다가왔는데 이곳 분향소에 와 설치된 사진을 보니 정말 큰 사고였다는 생각이 든다”며 “영정에 적힌 ‘엄마랑 같이 밥 먹자’라는 글귀를 봤을 때는 코끝이 찡했다”고 말했다.
진도=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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