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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 농담, 벼락부자 만들다… 불티나게 팔려나간 '애완 돌멩이'

입력
2015.04.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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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된 몽상

둥근 골재 애완동물처럼 포장해

10센트짜리 4달러에 팔아

30페이지 '페트락 훈련교본'

"내가 파는 것은 유머" 너스레

아이디어는 힘이 세다

열정 더해진 무모한 노력, '기적 만드는 도전' 상징 돼

1936.12.18~2015.3.24/ 해학적인 민담에 등장하는 봉황의 알과 달리, 페트락(pet rock)은 1975년 약 6개월 동안 실존했던 애완용 돌이다. 페트락을 판 게리 달도 그걸 산 미국 시민들도 자신의 돌을 생물인 양 연기했고, 서로의 연기를 자랑하며 즐거워했다. 페트락은 이제 전설이 됐고 그 현상은 미스터리로 남았지만, 봉황의 알과 달리 페트락은 지금도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
1936.12.18~2015.3.24/ 해학적인 민담에 등장하는 봉황의 알과 달리, 페트락(pet rock)은 1975년 약 6개월 동안 실존했던 애완용 돌이다. 페트락을 판 게리 달도 그걸 산 미국 시민들도 자신의 돌을 생물인 양 연기했고, 서로의 연기를 자랑하며 즐거워했다. 페트락은 이제 전설이 됐고 그 현상은 미스터리로 남았지만, 봉황의 알과 달리 페트락은 지금도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의 운명은 술자리 가벼운 농담 한 마디로 일변했다. 어쩌다 애완동물 돌보는 문제로 화제가 이어졌고, 다들 기다리기라도 한 듯 강아지 고양이 등이 끼치는 갖은 수고와 말썽, 사료값과 병원비 따위 불평들을 쏟아내던 참이었다. 그 순간 잠자코 있던 달(Dahl)이 한 마디 한다. “나는 돌을 키워(I have a Pet Rock).”

어리둥절해하는 친구들에게 들려준 달의 ‘애완 돌’자랑. “밥 줄 필요 없고 똥 치울 일도 없고 말썽도 안 피우고 씻기기도 쉽고 안 씻겨도 그만이고 산책 시켜달라고 조르지도 않고, 나보다 오래 살고, 또…, 또….” 좌중의 누가 ‘무슨 되잖은 소리냐’며 무질러버렸다면 그의 말은 썰렁한 농담으로 묻혔을지 모른다. 다행히 친구들은 열정적으로 맞장구를 치며 애완 돌의 장점들을 덩달아 몽상하기 시작했다.

결코 진지한 자리는 아니었고, 다들 달의 농담을 유쾌한 반어(反語) 혹은 평소에도 넌덕스러운 친구의 해 될 것 없는 장난쯤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심지어 달 자신조차, 불과 한 달 뒤 그의 돌에 다리가 돋아 미국 전역을 싸돌아 다니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리 됐다. 달의 돌은 ‘순종 페트락(pure blood pet-rock)’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그 해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6개월 동안 개당 3.95달러에 약 150만 개가 팔렸고, 실업자나 다름 없던 38세의 달은 벤츠를 타는 벼락부자가 됐다. 1975년 여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가토스(Los Gatos)의 한 허름한 술집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술자리 친구들이 다음날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들 때, 일 없는 프리랜스 광고업자 달은 책상 앞에 앉아 페트락에 대한 활유법의 몽상을 이어갔다. 페트락 돌보는 법, 재능과 특기, 길들이는 법, 훈련시키는 법…. 장장 보름 여의 작업 끝에 그는 30여 쪽의 팸플릿 ‘페트락 훈련교본(Pet-Rock Training Manual)’을 완성했다.

“박스에서 나오면 처음에는 긴장할지 모른다. 그러면 신문지 위에 가만히 올려놓아만 줘라. 페트락은 신문지가 왜 필요한지 스스로 알 테니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

톱밥 둥지에 가만히 놓인 페트락과 포장·운반 상자. 게리 달은 저 상자 속에 담은 게 실은 돌이 아니라 '유머'라고 안 했으면 더 좋았을 말을 했다.
톱밥 둥지에 가만히 놓인 페트락과 포장·운반 상자. 게리 달은 저 상자 속에 담은 게 실은 돌이 아니라 '유머'라고 안 했으면 더 좋았을 말을 했다.

그리고 술자리 친구들을 설득, 두 명에게서 페트락 분양사업 창업자금을 빌린다.(물론 소액이었겠지만, 이 대목은 그의 불가사의한 성공신화에서도 가장 큰 미스터리다. 훗날 그 돈은 투자냐 대여냐를 두고 법정 다툼으로 이어진다.)

그는 집 인근 산호세의 건축자재 상가를 찾아간다. 그가 고른 돌은 멕시코만 로사리타 해변에서 채취된 골재였는데, 달걀처럼 둥근 모양과 아이 주먹만 한 크기가 대체로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돌 한 개 값은 단돈 1센트(현재 환율로 약 10원)였다. 애완동물 운반용 케이지를 모방한 골판지 박스를 숨구멍까지 뚫어 주문 제작했고, 거기 대팻밥을 깔아 돌을 얹었다. 박스에는 회심의 역작인 매뉴얼 팸플릿을 첨부했다.

75년 8월 달은 페트락 시제품(?)을 샌프란시스코 선물용품 박람회에 출품한다. 그는 장난감 시장은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생명’을 지닌 상품을 장난감으로 내놓을 순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을지 모른다. 달은 자신의 주업을 살려 직접 보도자료까지 만들어 언론사에 배포한다.

페트락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도ㆍ소매 할 것 없이 주문이 쇄도했다. 가장 놀란 것은 그와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세 번째 아내 마거릿 우드(Marguerite Wood)였다. “처음엔 내가 ‘정신 나간’ 사람과 결혼한 줄 알았다”(LA타임스)던 그는 주문에 맞춰 물건을 포장하느라 바빠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된다. 부부가 단 둘이 시작했던 그 일은 시판 6주쯤 뒤부턴 300명도 넘는 보조 일꾼을 고용해야 했고, 크리스마스 직전에는 하루에만 10만 개가 팔려 나갈 정도였다.(워싱턴포스트, 2005.4.1). 석재 무게로 약 2.5톤에 달하는 양이었다. 미국 신문의 약 2/3가 페트락과 페트락 현상을 소개했고(Encyclopedia of POP Culture, Jane Stern), 달은 NBC 토크쇼 ‘The Tonight Show’에 두 차례나 출연하면서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드레스 색깔이 푸르냐 검으냐는 뜬금없는 문제를 두고 온 세상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지기도 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패트락 열풍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파동’처럼, 지금도 미스터리다. 달 자신의 분석처럼,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의 집단적 공허와 허탈감, 워터게이트 사건과 닉슨 대통령의 하야(1974년) 등 우울한 뉴스들에 지친 소비자들에게 달의 유쾌한 장난이 우연히 먹혔을 뿐일지 모른다. 그는 75년 ‘People’과의 인터뷰에서 “요즘 시민들이 다들 따분해하거나 각자의 문제들로 지쳐 있지 않은가. 페트락은 그들을 짧은 환상 여행으로 초대해준다. 사실 우리가 박스에 담은 건 (돌멩이가 아니라) 작은 유머다”라고 말했다. 달은 TV에 출연해서도 “우리는 엄격한 복종성향 테스트 등을 거쳐 우수한 페트락만을 선별해 배송한다”는 식으로 너스레를 이어갔다.

그의 말처럼 그가 판 것은 동명의 소설가 로알드 달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매뉴얼’책자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의 일부다.

(혈통에 대해) 당신의 페트락은 이집트 피라미드와 유럽 고대도시의 자갈길, 중국의 만리장성 속 선조들, 아니 시간이 시작된 그 순간 너머까지 혈통이 이어져 있다.

(기본훈련에 대해) 당신의 페트락은 누가 주인인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훈련은 필요하다. 페트락은 채찍이나 초크체인이 필요 없는 애완동물이다. ‘이리 와’같은 명령은 부드럽지만 단호해야 한다. 처음에 아무 반응이 없으면 정상이다. (…) 자기 페트락이 너무 멍청하다고 불평하는 고객들도 있지만, 모든 훈련에는 극도의 인내심이 요구된다. (…) 하지만 ‘멈춰’나 ‘앉아’같은 명령에는 기가 막히게 잘 따를 것이다.

(심화훈련에 대해) ‘굴러’같은 기술을 익히게 하려면 경사진 곳에서 훈련시키는 게 좋다. 일단 구르기 시작하면 지칠 때까지 구를 것이다. ‘죽은 척하기(Play Dead)’는 페트락의 주특기다.

로체스터기술연구소의 마케팅 전문가 유진 프램(Eugene Fram)은 “75년까지 수년 동안 (60년대의 훌라후프 같은) 아이디어 상품이 없었고, 무엇보다 부담 없는 가격이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라는 고전적 마케팅 이론으로 페트락 현상을 설명했다.(CJOnline.com, 1999.12.12) 50년대 베이비부머로 개인적 욕구를 중시하는 미 제너레이션(Me-Generation)의 소비취향에서 해답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저 모든 설명의 바닥에, 몽상을 실천으로 이어간 한 인간의 무모하리만치 경쾌한 영혼과 몇날 며칠 잠 설쳐가며 궁리하고 디자이너 등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으러 다녔던 열정과 노력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페트락이 대박을 터뜨리자 ‘페트 페블(애완 자갈)’같은 모방품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고, 페트락의 옷을 파는 업자들도 생겨났다. 디트로이트에서는 인조잔디와 콘크리트 비석까지 갖춘 페트락 공동묘지도 생겨났는데, 이런 묘비명도 있었다고 한다. “조지는 너무 많은 유리창에 덤벼들었다.”(LA타임스, 05.4.1)

페트락은 지금도 이베이(e-bay)같은 곳에서 개당 10달러 안팎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대학과 기업 광고 마케팅 관련 연구소들도 강의와 연구 테마 리스트에 페트락을 빼놓지 않고 있다. 일상에서도 페트락이란 낱말은 상징으로 건재하다. 납득하기 힘든 광적인 유행이나 덧없는 명성, 쓸모 없는 물건 따위를 나타낼 때, 또 기적을 만드는 도전정신 혹은 창의적 아이디어의 가치를 표상하려 할 때 사람들은 ‘페트락 같다’는 말을 쓰곤 한다.

게리 로스 달(Gary Ross Dahl)은 1936년 12월 18일 미국 노스다코다 주 보티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재소 인부였고, 어머니는 웨이트리스였다. 워싱턴주립대에서 마케팅을 전공한 그는 광고업체에 취직도 하고 프리랜스로도 일하며 30대 중반까지 힘겹게 생계를 꾸려갔다. 페트락을 만들 당시 그는 두 차례 이혼한 뒤 세 번째 결혼을 해서 전처들과 낳은 세 아이와 산타크루즈 외곽의 작은 오두막에 살고 있었다. 75년 말 그는 낡은 혼다 승용차 대신 신형 벤츠를 타고 산호세 외곽의 146평짜리 수영장 딸린 저택에 사는 부자가 된다.

70년대 말 그는 로스가토스에 ‘케리 네이션스(Carry Nations)’라는 상호의 술집을 차렸다가 금세 망한다. 케리 네이션스(1846~1911)는 금주법이 시행되기도 전인 19세기 말~20세기 초 활약한 전투적인 금주운동가로, 술집에 난입해 집기를 부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는 여성이다. 친구였던 투자자 두 명이 자기네에게 돌아온 몫이 너무 적다며 소송을 건 것도 그 즈음이었다. 법원은 달에게 ‘여섯 자리 숫자(수십만 달러)’의 돈을 그들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달은 아이디어로 백만장자 되는 법(How to Turn Your Idea Into a Million Dollars)이라는 책을 쓴 돈 크라케(Don Kracke)와의 인터뷰에서 “페트락 외에도 네 개의 아이디어가 더 있다”고 말했고, 실제로 모래를 배양해서 자신만의 사막을 만드는 키트(Original Sand Breeding Kit) 등을 선뵀다. 하지만 모래의 성별 테스트기 등을 포함시킨 그의 새로운 ‘장난’에 세상은 시큰둥해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게리 달 크리에이티브 서비스’라는 마케팅 홍보대행업체를 세워 2006년 은퇴할 때까지 일했다. 2000년 한 대학이 주최한 창작 괴담 콘테스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2001년 바보들을 위한 광고(Advertising for Dummies라는 책을 썼다.

그는‘제2의 페트락 신화’를 꿈꾸는 수많은 이들이 미국 전역에서 몰려들어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들려주고 조언을 구하려 드는 통에 사실상 은둔자처럼 산 적도 있고, 그 탓에 생업에 곤란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99년 12월 cjonline에 응한 10여 년만의 인터뷰에서도 그 고충을 털어 놓았다. 그 인터뷰 기사는 달의 요청대로 “그에게 전화 걸지 말라(Don’t call him)”로 끝난다. 페트락 인기가 시들해진 직후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페트락을 만든 사실을 사람들이 잊더라도 나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10여 년 뒤인 88년 AP 인터뷰에서는 “가끔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는데, 만일 내가 그걸 안 만들었다면 내 삶이 어땠을지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찐득이’라 불리는, ‘WACKY WALLWALKER(벽 타는 괴짜ㆍ벽에 던지면 달라 붙었다가 서서히 떨어지며 기어 내려오는 고무 장난감)’를 1983년 개발해 무려 2,000여 만 달러를 번 켄 하쿠타(Ken Hakuta)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장난감 인기가 좀 더 지속됐다면 정신과 의사들이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1시간에 100달러씩 하는 상담치료 대신 골방에 혼자 앉아 ‘찐득이’를 갖고 한두 시간만 놀다 나오면 기분이 나아질 테니까.”(virtualpet.com)

하쿠타의 말에 동의하든 않든, 또 달이 페트락으로 하여 달라져버린 자신의 팔자를 원망하든 않든, 그의 그의 페트락이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들이 주는 즐거움’과 그 의미를 생각해볼 계기를 선사했다는 사실은 기억돼야 한다.

게리 달은 3월 24일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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