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난 자식들이 먹고 살 길 막막하니 부모 무덤 앞에서 유산 다툼 하는 꼴이다”
4ㆍ29 보궐선거에 광주서을 지역구에 출마한 강은미 정의당 후보 측이 지난 주말 낸 논평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식들은 무소속으로 출마한 천정배 후보와 새정치민주연합 조영택 후보를 말하는 것이고 부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뜻합니다. 강 후보 측은 천 후보와 조 후보가 ‘DJ는 우리 편’이라며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을 비꼬았습니다.
양측은 19일 열린 선거관리위원회 주관 TV토론회에서 폭발했습니다. 조영택 새정치연합 후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거 직전 야권 연대를 통한 정권 교체를 박지원 비서실장을 통해서 발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훈이라고 생각한다”며 “김 전 대통령은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저서를 통해 민주정치는 정당정치, 당이 더 좋은 평가를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며 무소속 천정배 후보를 겨냥했습니다.
천 후보는 “민주당 중심의 정권교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국민들의 정권교체 열망에도 문재인 후보는 (대선에서) 당선되지 못했지만, 반성과 성찰, 쇄신, 비전 제시가 없다”면서 “이대로는 정권 교체가 불가능하다. 비전 있는 정당, 쇄신을 통해 정권 교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DJ의 진정한 뜻을 따르기 위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됐다”며 반박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 주장의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DJ를 꺼냈습니다. 심지어 조 후보는 “최근 국민여론 조사 결과 새정치연합은 지지율이 10%로 상승하고 새누리당과 4%정도 차이가 난다. 우리당 대권후보 세 사람 모두 1~3위를 차지는 등 사람들이 정권 교체에 대해 많이 공감하고 있다”며 “유독 천 후보만이 희망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공허해 보인다. 이희호 여사도 당을 깨면 안된다고 말했다”고 이희호 여사까지지 ‘모셔왔습니다’. 천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은 20년 전 지역등권론을 주창했다. 지역평등 뉴패러다임을 실현하겠다. 지역평등특별법을 제정하고 대통령 직속에 지역평등위원회를 설치해 인사, 예산, 국책사업 등에 지역 등을 통해 호남 낙후를 해소하겠다”며 자신이 DJ적자임을 강조하며 절대 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신경전은 앞서 ‘DJ 사진 현수막’을 놓고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정현 새정치연합 수석 부대변인은 18일 논평을 통해 “천정배 후보가 20여년 전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안산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김대중 총재와 찍은 사진을 선거홍보용 현수막에 게재한 것은 번짓 수가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당장 철거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그는 “천 후보가 안산에 출마할 당시 사진인 것을 알고 사용했다면 이는 광주시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당장 현수막을 떼든지 아니면 그 현수막을 들고 안산으로 돌아가 출마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천 후보 측은 “선거법 상 아무 문제 없는 사실을 트집 잡고 있다”며 “문재인 대표는 노무현 정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송금에 대한 특검으로 햇볕정책을 훼손했다. DJ정신을 상실한 문재인호 새정치민주연합이 비판할 자격이 있나”라고 반문했습니다. 이어 “광주와 호남정치의 기득권에 취해온 새정치연합이 DJ정신마저도 독점권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20년 전 ‘지역등권론’을 제시했다. 천 후보는 이를 계승 발전시켜 법적 제도적으로 강력히 뒷받침하는 ‘지역평등론’을 제시, 호남의 소외와 낙후를 극복할 비전을 제시한 바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양측이 상대방을 향해 ‘DJ를 논할 자격이 없다’고 까지 하면서 날을 세우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DJ의 지지나 응원 없이는 호남 민심을 얻을 수 없다는 오래된 ‘정치 공학적 진리’를 따르겠다는 이유가 가장 큽니다. 사실 DJ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들은 매 선거 때마다 반복됐습니다. 대선의 경우 예비 후보들부터 DJ 사저에 찾아가 인사를 하고 덕담을 듣고 오는 것이 필수 코스가 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한화갑, 한광옥, 김경재 등 옛 동교동 인사들 영입에 공을 들인 것도 그 인사들 자체보다는 그들이 DJ의 측근이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대선 당시 박 대통령이 ‘동교동계 2인자’인 권노갑 새정치연합 상임고문을 끌어들이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는 말도 들립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뜨거운 적은 흔치 않습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이 DJ의 마음을 얻기 위한 애정 공세가 뜨거웠습니다. 당시 민주당이 한나라당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발의에 동조하면서 양측은 ‘적’이 됐고, 호남 민심을 얻기 위해 ‘이판사판’으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DJ를 자신의 편으로 모시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DJ가 살아 있을 때이고, 지금은 DJ가 세상을 떠난 상태입니다. 물론 DJ는 분명 호남 민심을 얻는데 중요한 키워드이자 상징입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DJ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경우도 많지 않았지만 DJ 지지는 호남 지역에 출마하거나 다른 지역의 호남 출신 유권자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할 기본”이었다며 “반대로 난 DJ 지지 필요 없다고 외친 후보들은 대부분 철퇴를 맞고 말았다”고 전했는데요.
갑작스레 과연 하늘에 있는 DJ는 자신을 놓고 경쟁을 펼치는 두 후보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슬픈 상상’을 해봤습니다. DJ는 결코 선거가 한창인 지금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DJ 유산 논쟁’은 결코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강은미 후보 측은 양측 공방이 가관이고, 민망한 광경이라고 했습니다. 강 후보 측은 “DJ정신이 이렇게 값싼 취급을 받은 적은 없었다”며 “호남 정치와 DJ정신에 대한 광주 시민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DJ정신에 이렇게 먹칠을 해선 안 된다”라고 싸잡아 비난했는데요.
DJ를 논할 자격을 가지고 저리 싸우는 두 후보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말하는 ‘DJ 정신 계승’ ‘호남정치 복원’은 선거용 구호, 선거용 수사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슬픈 예감이 들었습니다.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는 암울한 현대사의 한 복판에서 ‘미래에 대한 비전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했던’ DJ의 모습을 본받아 공약과 정책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중요하지, 누가 DJ랑 더 가깝다는 유치한 경쟁을 펼칠 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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