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학교서 3년간 체계적 교육… 극장ㆍ음식점서 음악예술가로 활약
"관객들, 공연 보러 구름같이 몰려"
“모두 비상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단원들은 열광했다.(중략)노래가 끝나자 기생들을 찾아가 사인을 구하는 사람들이 쇄도했다. 기생들은 능숙한 솜씨로 서명을 했다.”
1920년대 한 일본인 무리가 장고를 치며 일본 유행가를 부르는 평양기생들을 보고 남긴 글이다. 그들은 평양의 기생학교를 “진기한 것”으로 표현하며 “앞으로 5년, 10년 뒤에는 그녀들 중 놀라운 배우, 음악가 등 예술가가 나오게 될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실제 당시 평양기생이라 하면 미와 끼를 갖춘 조선시대 최고의 ‘예능인’으로 손꼽혔다. 이들을 길러내는 평양 기생학교는 일본인들의 평양 관광 필수코스로 자리잡았고, 일본이나 타국 사람들이 평양 관광을 왔다가 기생구경을 하고 가지 않으면 의아해할 정도였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가 지난 24, 25일 한양대에서 열린 ‘동아시아의 문화표상’국제학술회의에서 평양기생에 대한 연구 논문인 ‘표상으로서의 평양기생’을 발표했다. 조선의 기생문화를 다룬 논문이나 책은 적지 않지만 그 대표격인 평양기생을 식민지 시기를 중심으로 다룬 논문은 별로 없다.
이 논문에 따르면 1914년 37명에 불과했던 평양기생은 1929년 164명, 1934년 285명, 1940년에는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평양기생수가 이처럼 급격히 늘어난 건 평양이 기생교육의 본거지로 자리잡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평양의 기생학교는 갑오개혁 이전 관기 교육시설에서 출발해 대한제국시절 ‘기생서재(書齋)’가 들어서며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이후 기생서재가 많아지자 통합 작업도 있었고, 그 결과 1921년에 이 ‘기성권번 학예부’가 탄생했다. 이곳에서 기생들은 3년 코스로 시조, 가곡, 산수, 춤, 노래, 일본어 등을 익혔다. 그 중에서도 노래를 가장 중요시했는데 기생들은 양반들이 유유자적하면서 위엄을 잃지 않는 분위기로 노래하는 가곡, 애절한 아리랑 등을 배웠다.
1930년대 들어서는 근대화에 젖어 들기 시작한 젊은이들을 위해 풍자극 무용인 레뷰(revue) 춤도 배웠다. 기생학교 학생들의 공연을 본 한 일본인은 “꽃과 같이 아름다운 유명한 일류 기생들”이라며 “우아하고 기품이 있는 자태는 해당화가 이슬을 머금은 듯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또 평양기생들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해 “그녀들을 음악예술가로서 대우했다”고 했다.
평양기생들은 학교를 벗어나 음식점 누각이나 극장서 가무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매일신보는 “밤마다 구경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며 “수십여 명의 선녀같이 아름다운 예기의 얼굴들이 등불 빛에 둘러싸였다”고 보도했다. 공연이 끝나면 기생들에게 사인을 받기 위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기도 했다. 재능을 인정받은 기생 중에는 가수로 직업을 변경하는 경우도 많았다. 박 교수는 논문에서 “평양이 ‘가수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기생가수들이 많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 예로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로 손꼽혔던 왕수복은 1937년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직후부터 북한서 민요가수로 활동해 공훈 배우가 됐다.
평양기생의 삶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기가 많고 잘 나가는 기생이 있으면 반대로 ‘잘 안 팔리는’기생도 있는 법이다. 이들은 대개 매음으로 빠졌고, 이것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기독교, 청년회 등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언론 또한 기생들의 밀매음을 앞장서 비판하기도 했는데 당시 동아일보는 그런 기생을 더러“더럽게 몸을 팔고 음란한 노래를 부르며 부끄러움 없이 시가지와 보통 인가 근처에 섞여 (중략)풍기를 문란케 한다”고 보도했다. ‘기생=매음녀’라는 이미지가 생겨나 기생폐지론이 대두된 배경이다. 하지만 박 교수는 “평양기생들은 기생학교에서의 수업, 연주회, 대중가수로의 진출 등으로 인해 예능인으로서의 이미지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며 이들을 대표하는 표상은 “연예인”이라고 평가했다.
김진주기자 pearlkim7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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