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29 재보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광주 서을에 출마한 천정배 의원이 당선됐다. 새정치연합의 전패로 야권 재편에 대한 요구가 거세진 가운데 호남 정치 부활을 외친 천 의원의 향후 행보에 시선이 쏠린다. 천 의원은 당선 소감에서 “호남 정치를 살리겠다”며 “야권 전면 쇄신을 통해 정권교체의 밀알이 되겠다”고 말했다. 사실상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를 향한 선전포고로 보인다. 정치 생명의 기로에서 극적으로 생환해 야권 재편의 키를 쥐게 된 천 의원이 향후 밀알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과거 그의 정치 행보를 통해 가늠해본다.
① ‘천신정’과 강정구 교수 사건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거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창립 멤버인 천 의원은 1996년 15대 총선에 경기 안산 단원서 당선돼 정계에 입문한다. 정치인 천정배로 본격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2년 민주당 대통령 경선. 당시 경선서 주목을 받지 못하던 노무현 후보를 현역의원 처음으로 지지 선언을 하면서다.(▶기사보기) 이후 노무현 정부서 ‘천신정’(천정배ㆍ신기남ㆍ정동영)으로 대표되는 개혁 세력으로 불리며 민주당 해체와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한다. (▶기사보기) 노무현 정부 창업공신인 천 의원은 법무부장관 재임 시절에도 논란의 한복판에 선다. ‘6ㆍ25 한국전쟁은 북한의 통일전쟁' 발언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에 대해 불구속 수사지휘를 내렸기 때문이다. 당시 검찰과 보수층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와 관련한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인 것이다. (▶기사보기)
② 경솔한 언행으로 어긋나긴 시작한 행보
천 의원은 이명박 정부 들어 4선 의원으로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을 맡는다. 이때 한나라당의 강행 처리로 미디어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2009년 7월 의원직 사퇴를 선언한 뒤 원외투쟁에 나선다. 하지만 이듬해 2월 사퇴 의사를 번복해 지역구 의원으로서 의원직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다. (▶기사보기) 의원직 복귀 의사를 밝힌 천 의원은 2010년 10월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된다. 하지만 이후 장관을 지낸 야당 중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친 언사로 비판을 받는다. (▶기사보기) '소탕해야 한다. 죽여버려야 하지 않겠냐' 등 이명박 정부를 향한 막말에 한나라당이 반발하자 천 의원은 한 발 더 나간 독설로 논란을 확산시킨다. (▶기사보기)
③ 잇따른 악수
천 의원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기사보기) 천 의원의 서울시장 도전에 대해서는 당내서도 비판적 시각이 많았다. 경기 안산서 4선을 한 천 의원이 서울시장에 나서는 게 적절한 것이냐는 이유에서다. 결국 천 의원은 당 지도부의 만류에도 불구, 또 다시 의원직 사퇴 의사를 밝히고 주소를 서울 관악구로 옮겨 당내 경선에 뛰어든다. (▶기사보기) 하지만 박영선 의원에게 패하면서 도전에 실패한다. (▶기사보기 ) 절치부심한 천 의원은 2012년 4월 총선서 새누리당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송파을에 나서지만 또 다시 패하면서 야권 중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④ 수구초심의 심정으로?
수도권에서 잇따라 좌절을 맛 본 천 의원의 시선이 향한 곳은 호남이다. 천 의원은 지난해 7ㆍ30 재보선을 앞두고 호남 복귀 의사를 공식적으로 내비친다. 광주 광산을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기사보기) 하지만 당 지도부는 권은희 전 서울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을 전략공천했고, 천 의원의 복귀는 멀어진다. 무소속 출마까지 고려하던 천 의원은 권 전 수사과장에 양보하며 한발 물러선다. 하지만 올해 4월 재보선서는 물러서지 않는다. 새정치연합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광주 서을에 출마,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다. (▶기사보기) 사실상 마지막 정치 승부수를 던진 천 의원이 기사회생하면서 야권 재편의 핵심으로 떠오른 순간이다. 호남발 정치 재편의 기로다.
김성환기자 bluebir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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