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개발국 실질적으로 바꾼 '중간기술'
개도국 기술보다 생산력 높고
선진국 기술보다 자본 덜 들어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 '대안기술'
선진국 저소득층 위한 '사회적 기술'
대체에너지 개발서 출발, 영역 확장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중고교 교과서에서도 다루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적정기술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일은 사실 만만치 않다. 적정기술은 최근에 생긴 개념이 아니며,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의 역사적 국면들이 뒤얽혀 있다. 적정기술의 태동에 관여한 세 줄기 즉 중간기술, 대안기술, 사회적 기술을 먼저 알아야 적정기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저개발국 빈곤 탈출을 위한 ‘중간기술’
적정기술의 첫 번째 줄기는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을 위해 시작됐다. ‘빈곤 탈출 및 주민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라는 개념이 1965년 9월 칠레 산티아고에서 유네스코 주최로 열린 컨퍼런스에서 처음 소개됐다.
이 컨퍼런스의 주제는 ‘라틴아메리카의 발전을 위한 과학기술의 응용’ 즉 2차 세계대전 이후 20년 동안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개도국에 막대한 과학기술 원조를 했음에도 왜 그렇게 개도국 사회의 발전은 지지부진했는지를 규명해 보자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지원정책의 출발부터 잘못이었음을 지적했다. 선진국들은 모든 국가가 똑 같은 형태의 산업화 과정을 따라야 한다는 전제 하에 개도국의 자연적·문화적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지원을 했고, 이는 각국에서 효율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었다.
‘노동집약기술 대 자본집약 기술’ 세션에서 독일 출생의 영국 경제학자인 슈마허가 한 강연 ‘중간기술의 개발을 요구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는 이 컨퍼런스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짚었다. 이 강연은 그가 1973년에 출간한 기념비적인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 수록돼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으며, 타임지가 선정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100권에 포함됐다.
강연에서 슈마허는 기술 수준을 ‘평균 작업장 설비 비용’으로 정의하고 개도국의 토착기술을 1파운드, 선진국의 기술을 1,000파운드짜리 기술로 상정했다. 슈마허는 “가난에 허덕이는 지역에서 경제개발을 하려면 1파운드짜리와 1,000파운드짜리 기술의 장점을 결합한 100파운드짜리 ‘중간기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간기술은 “전형적인 개도국의 기술보다는 생산량이 높고, 자본집약적인 (선진국) 기술에 비하면 매우 저렴할 것이며, 유지보수가 쉽고 시장의 변화에 더 잘 적응할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또 중간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미 존재하는 전통산업 기술에 선진 노하우를 적용해 개량하는 방법 ▦최신 기술을 개조하는 방법 ▦실험과 연구를 통해 중간기술을 직접 확보하는 방법의 3가지를 제시했다. 슈마허는 “정부나 대중은 거대 프로젝트에 관심을 쏟지만 이런 관심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제 필요한 것으로 돌려야만 빈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슈마허는 단순히 주장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1966년 영국 런던에 중간기술개발집단(ITDG)을 설립했다. ‘기술의 지속 가능한 사용을 통해 개도국의 빈곤을 퇴치하는 것’을 설립목적으로 내걸었다. 지금은 보다 포괄적인 ‘프랙티컬 액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1960년대 후반 2류 기술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는 ‘중간기술’ 대신 ‘적정기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슈마허가 주창한 적정기술은 인도의 베어풋 칼리지, 에디오피아 Salem, 미국의 IDE, Kick Start, D-lab, 오스트리아의 GrAT, 그리고 한국의 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 나눔과기술,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 등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발전되고 있다.
과소비 아닌 병폐 해결을 위한 ‘대안기술’
적정기술은 개도국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선진국에서도 ‘자본 집약적이고 자원·에너지를 과소비하는 기술에 대한 대안기술(Alternative Technology)’이 절실하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선진국에서 적정기술(대안기술)의 급부상은 1960년대 시민권 운동, 신좌파 정치운동, 반전투쟁, 반문화운동, 환경주의 등의 영향이었다. 이러한 저항운동이 현대 산업사회의 근본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산업혁명 이후 150여년 동안 기술의 발달은 인간 진보의 확대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가장 복잡한 생산물이 진보에 역행하는 전쟁에 동원됐다는 비극적인 사실이 갑작스레 드러났다. 환경파괴나 빈곤, 자원고갈, 소외 등 여러 병폐를 해소하는 데에 제대로 된 기술이 사용돼야 마땅했다. 이러한 관점에 동조해 만들어진 단체가 1969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설립된 신연금술연구소, 캘리포니아주 패럴론연구소 등이다. 이들에게 대안기술이란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저렴하고 ▦쉽게 운행하고 수리할 수 있도록 단순하며 ▦소규모 운영에 적합하고 ▦인간의 창의성에 부합하고 ▦환경 보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
영국에서는 1973년 제러드 모건이 대안기술센터를 설립했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출간된 해이다. 그 설립목적은 “전 지구적으로 지속가능하고, 온전하며, 환경적으로 건강한 기술과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현재 대안기술센터는 지구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인 기후변화, 환경오염, 자원낭비 등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기술과 생활방식을 연구하고 널리 알린다. 그 일환으로 ‘클린 슬레이트’라는 정기 간행물을 발행하고 지속 가능한 삶과 관련된 여러 과정들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서 적정기술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람들은 시민운동가와 귀농을 통해 대안적인 삶을 살고자 하던 그룹이었다. 예를 들면 이동근은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통해 적정기술을 접하게 된 후 영국 대안기술센터에서 환경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2006년에 경남 산청에 대안기술센터를 설립했다. 이후 김성원 이재열 안병일 등이 귀농하면서 전남 장흥, 경북 봉화, 충남 아산, 전북완주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적정기술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사회적 격차 해소를 위한 ‘사회적 기술’
선진국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산다. 1973, 4년 석유파동이 발생하자 미국인들은 늘 값싸고 풍부하고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왔던 석유가 어느 날 고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게다가 위기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심각한 타격을 입는 것은 저소득층이었다.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1976년 몬태나주에 국립적정기술센터(NCAT)가 설립됐고, 미국 내 저소득층 가정에 필요한 기술 및 공정을 개발하는 데에 집중했다. 이것이 적정기술의 마지막 줄기, ‘선진국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적 기술(SocialTechnology)’이다.
국립적정기술센터는 적정기술의 특징을 ▦적용하기 간단한 것 ▦자본 집약적이지 않을 것 ▦에너지 집중적이지 않을 것 ▦지역의 자원과 노동력을 사용할 것 ▦환경과 인간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정리했다. 센터의 설립 당시 가장 큰 문제는 저소득층의 에너지 비용 부담이 과다하게 불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초기에 센터는 주로 대체에너지 개발에 집중했다. 이후에는 주거, 식량 생산, 운송, 경제개발과직업 등 다양한 분야로 관심사를 넓혔다.
호주에서는 1980년 중부지역의 작고 외딴 원주민 공동체에 적합한 기술을 제공하기 위해서 엘리스 스프링스에 적정기술센터(CAT)가 설립되었다. 주민들이 지속 가능한 생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최근 한국 정부도 ‘국민편익증진기술(QoLT·Quality of Life Technology)’ 또는 ‘사회격차해소기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저소득층, 노약자 등과 같은 국내의 소외 계층을 돕기 위한 기술 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오늘날 적정기술의 개념과 연구집단은 전 세계로 확장됐다. 선진국과 개도국이 처한 환경은 상이하지만 적정기술이 가져야 할 특징은 매우 유사하다. 인간 중심의 필요한 기술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어디서 개발된 적정기술이든 전 인류가 교환하고 공유해 사용할 수 있다.
홍성욱·국립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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