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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운동에 바치는 철학적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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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운동에 바치는 철학적 헌사

입력
2015.05.1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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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뿌리 고찰·종교적 해석 시도

"5·18은 죽음의 공포 극복한 연대"

1980년 5월 광주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들이 "계엄을 해제하라"고 외치며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한 군사적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은 금남로에 섰고, 존엄을 지켜내려는 주체들의 응답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 5월 광주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들이 "계엄을 해제하라"고 외치며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한 군사적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은 금남로에 섰고, 존엄을 지켜내려는 주체들의 응답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5월 광주를 생각하면 명치 끝이 아리다. 계엄군에게 짓밟힌 시신의 모습 앞에 ‘홍어택배’를 운운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국민통합 저해요소쯤으로 여기는 시대를 살아내야 하니 쓰라림이 더하다.

5·18 민주화운동의 철학적 가치를 새긴 신간 ‘철학의 헌정, 5·18을 생각함’(도서출판 길)은 이런 무사유 시대에 철학의 존재 이유를 증거하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의 철학과 종교학적 성찰이 어떻게 항쟁을 기억하고 되살릴 수 있는지, 그 전범을 보여온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다. 5·18의 본질을 역사학, 사회학이 아닌 철학 바탕에서 논한 책은 처음이다.

이 책은 소위 거리의 철학자였던 그가 2005년 동료교수 전원의 지지 속에 전남대에 몸을 담은 이후, 약 6년간 5·18에 몰두한 결과물이다. 앞서 관련학회에 소개된 발표문 등을 다듬어 엮었지만, 당초부터 단행본을 염두에 둔 계획 하에 집필돼 각 글이 유기적으로 5·18의 가치를 그려낸다. 책은 5·18이 형성한 공동체의 속성을 분석하고, 그 역사적 시원(始原)을 고찰하고, 항쟁을 일종의 계시로 이해하는 종교적 해석을 시도하는 등 철학과 종교학을 종횡무진한다.

저자는 5·18이야말로 “죽음의 공포를 뛰어 넘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해, 놀랄 만큼 치열하게 모두가 더불어 자신들을 공통의 주체로 정립한 사건” 즉 “서로주체성의 집약”이었다고 말한다. 서로주체성이란 그가 2007년 저서 ‘서로주체성의 이념’에서 서양의 주체성(홀로주체성)에 대비해 내놓은 개념이다. 내가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 상대가 객체나 노예, 식민지, 제3세계가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이 서양의 주체성이라면, 모두가 동시에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서로주체성이다.

“처음 불을 댕긴 학생들은 물론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택시기사들, 그들에게 밥을 먹인 시장의 상인들, 헌혈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술집 여인들, 그들의 팔에서 피를 뽑은 의사와 간호사 등 누구 하나 객체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역사적 주체가 자기를 정립하는 것을 보며, 그와 함께 역사적 주체의 삶으로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김 교수는 “철학의 위대함은 언제나 그것이 뿌리박은 역사의 위대함에 빚지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 사회통합지원센터 제공
김 교수는 “철학의 위대함은 언제나 그것이 뿌리박은 역사의 위대함에 빚지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 사회통합지원센터 제공

이 같은 순수한 자발성의 뿌리를 그는 부마민주항쟁, 더 나아가 전태일의 역사에서 읽어낸다. 유신치하에서 더 내려갈 곳 없이 짓눌린 젊은 영혼들이 떨치고 일어난 부산과 마산에서 발현된 진리의 불꽃이 이듬해 광주로 옮아 붙어 터져 나왔다는 견해다. 1979년 부산과 마산, 1980년 광주에 앞선 보다 본질적 근원은 전태일 열사의 산화에서 찾는다. 전태일의 산화가 비로소 분출한 비극과 부끄러움이 이후 숱한 항쟁의 기폭제가 됐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무신론자도 아니지만, 좁은 의미의 기독교인도 아니라”고 말하는 저자는 ‘신이 존재한다면 그 진리는 역사 속에 있다’는 종교관을 통해서도 5·18을 이해한다. 그에게 전태일은 예수의 슬픔 분노 눈물 빛을 자기 속에 하나로 구현한 영혼이었으며, 부마항쟁과 5·18은 전태일의 눈물이 펼쳐지고 부활한 사건이다. 이 때문에 5·18은 “영원히 살아 역사하는 보편진리” “전대미문의 진리사건” “눈물 속에 도래한 진리”다.

“무슨 내력이 있어 아직도 5·18을 모욕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아무리 죽이고 또 죽여도 5·18이 죽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의 빛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진리를 모욕하고 다시 그 심장에 못을 박음으로써 진리를 매장하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대검으로 찌르고 총알로 뚫어도 진리는 죽지 않는다.”

김 교수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2011년에 완성한 글들을 지금껏 손에 쥐고 있었던 까닭은 ‘폭력의 윤리’라는 꼭지를 아직 쓰지 못한 탓”이라며 “더 늦어지지 않도록 우선 출간을 했지만 개정판을 낸다면 꼭 보충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가장 약한 자가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폭력이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 윤리의 척도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 5·18”이라며 “오로지 타인의 고통에 목숨을 걸고 응답하려는 용기 위에 기초한 연대의 공동체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영원한 꿈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서로주체성의 이념이 제 철학의 서론이었다면 이 책은 제 철학의 본론”이라는 그의 목소리는 명쾌했다.

그가 5·18에 바치는 이 곡진한 헌사의 목표는 역사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 뜻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각자의 슬픔의 고향으로 돌아가 슬픔의 바다를 만나자. 그리고 그 바다에 가라앉은 우리의 세월호를, 절망의 시대를 슬퍼하자. 그리고 온 세상 눈물이 고인 그 바닷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하자. 그 부끄러움이 밑 모를 슬픔의 바다 끝에 이르러 끝내 시대를 바꾸는 함성으로 다시 떠오를 때까지.”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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