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유명한 대리석상 다비드는 이상적인 인체의 아름다움을 구현한 작품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사실은 당대의 정치 상황이 반영된 작품이다. 메디치 가문을 몰아낸 피렌체 시의회는 피렌체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조각상을 미켈란젤로에게 주문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희망찬 표정이 아니라 굳은 표정을 짓는다. 격변의 시기에 피렌체 시민들이 느끼는 위기감을 표현한 것이다. 불과 한 세대 전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가 메디치 가문을 위해 만들었던 청동상 다비드는 쓰러진 골리앗의 머리를 발치에 둔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예술작품이 영원불변의 미를 추구한다지만 미술작가도 사람이고, 작품에는 인간의 욕망과 역사의 흔적이 남는다. 저자는 서양 근대미술 작품을 제작된 시대상과 연결해 설명한다. 중세 프랑스의 랭부르 형제가 그린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부터 현대 독일의 케테 콜비츠가 조각한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지난 역사를 증언한다.
책에 따르면 그림은 정치적 선전 수단이 되기 쉽다. 구교와 신교 사이의 종교 전쟁이 벌어진 17세기 그림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바로크 미술은 절대왕정의 위엄을 표현하는 데 동원됐다. 1793년 자크 루이 다비드는 욕조에서 살해당한 혁명가 장 폴 마라를 순교자로 묘사하는 그림으로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을 찬양했고 1832년 외젠 들라크루아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민중 혁명을 긍정했다.
때로 화가는 중첩된 의미를 숨겨놓는다. 미국 화가 이스트먼 존슨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58년 ‘남부 흑인들의 삶’을 그렸다. 흑인들이 집 마당에 둘러앉아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는 이 그림을 남부인들은 “흑인들은 현재 처지에 만족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다 쓰러져가는 흑인의 집 뒤로 단단하게 지은 2층집 창문에서는 백인 여성이 흑인을 내려다보고 있다. 흑인들은 평화롭게 살고 있지만 엄연한 감시와 차별이 있음이 드러난다. 존슨의 그림은 해리엇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함께 흑인 인권 문제를 제기한 작품으로 역사에 남았다.
책은 서구의 유명 회화를 중심으로 인류사를 따라가는 한편 생소한 작품도 조명한다. 소비에트 혁명 후 러시아의 미래를 유토피아로 묘사한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이 대표적이다. 조선의 민화는 멕시코 혁명을 기록한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와 함께 피식민지 국민의 의지를 보여준 작품으로 소개됐다.
인현우기자 inhy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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