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교환수로 일하던 19세 키프, 화가 로크웰 제안받고 모델 승락
2차대전 전시 홍보물… 남성근로자들에 대한 선전포고
1943년 5월 29일, 발행부수 400만 부를 자랑하던 미국 주간지(현재는 격월간지)‘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EP)’는 메모리얼데이 기념호 표지를 화가이자 일러스트 노먼 로크웰(Norman Rockwell, 1921~1978)의 그림으로 장식한다. 작업복 차림의 건장한 여성이 커다란 리벳건을 무릎에 얹고 점심 도시락을 먹는 모습. 샌드위치를 든 그의 왼팔은 이두박근이라도 과시하려는 듯 구부렸고, 발은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을 짓밟고 있다. 무릎 위 도시락에 새겨진 ‘로시(ROSIE)’라는 이름 때문에 ‘리벳공 로시(Rossi the Riveter)’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그 그림은, 우선 전시(戰時) 미국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 추세를 반영한 거였지만 한편으론 더 많은 여성 인력을 동원하기 위한 국가와 자본의 홍보물로, 미국 전시채권 판촉용 포스터로 두고두고 활용됐고, 또 유명해졌다. 6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내건 여성 파워의 상징 모델이기도 했고, 2001년 9ㆍ11사태 이후에는 애국주의의 한 표상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그림 ‘리벳공 로시’의 모델이었던 메리 도일 키프(Mary Doyle Keefe)가 4월 21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제2차 세계대전은 여성 노동력의 사회화에 양적인 면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크게 기여했다. 전쟁 특수와 남성 노동자의 대규모 징집으로 미국은 군수산업을 비롯한 산업 전 영역에서 심각한 인력 부족사태를 겪었다. 여성 노동력 외에는 대안이 없었고, 그러자면 노동 시장의 전통적인 성 역할에 대한 인식부터 허물어져야 했다.
‘미국 여성의 역사’라는 부제를 단 사라 에번스(Sara M. Evans)의 책 자유를 위한 탄생에는 1943년 ‘포춘’지 기사 한 구절이 인용돼 있다. “실질적으로 사회로 유인할 수 있는 미혼 여성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다음 산업 노동자의 잠재적 재원으로는 가정 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통념으로나 실제로나 당시 여성 취업자는 대부분 미혼이거나 독신 여성이었고, 교사 등 일부 직종을 제외하면 그들 대부분은 웨이트리스 등 서비스업 종사자였다. 포춘은 “우리는 여성이 무엇을 해야 한다거나 할 수 없다는 강력하고 뿌리 깊은 관념을 가진 인정 많고 다소 감상적인 사람들이다. 사려 깊은 많은 사람들이 기혼 여성을 고용하는 묘안에 대해 진심으로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저 기사는 고용주, 즉 기업인들의 상황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남성 노동자의 고정관념에 대한 절박하고도 전면적인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그 즈음 미국 연방고용국 조사에 따르면 고용주들은 여성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일자리 비율을 42년 1월 29%에서 7월 55%로 대폭 개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그들은 여성과 함께 또는 여성 밑에서 일할 수 없다며 수시로 작업 거부를 감행하는 남성 노동자들을 염려하고 있다고 저자 에번스는 적었다. ‘리벳공 로시’의 저 우람한 팔뚝은 그러니까, 유럽 전선의 나치를 겁주고 그들과 싸우는 미군 청년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군함과 전투기를 생산하는 군수공장 남성 근로자들의 인식을 겨냥한 거였다. 미국 전쟁사 속 여성(주미영 지음, 인간사랑)은 2차대전 4년 동안 약 600만 명의 신규 여성 유급노동자가 탄생했다는 사실과 함께 다양해진 여성 직종 통계를 인용하고 있다. 미국 경제사 백과사전은 미국 여성 노동자 수가 1940년 1,200만 명에서 44년 2,000만 명으로 57% 급증했고, 방위산업체의 경우 20~34세 미혼 남성 종사자가 170만 명인 반면 여성 노동자는 410만 명에 달했다고 기록했다. 그들 상당수는 건국이래 아내이자 주부로서 제 역할을 한정해왔던 중산층 백인 기혼 여성들이었다.
반전은, ‘리벳공 로시’의 모델 키프가 리벳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버몬트 주 알링턴의 작은 마을에서 어머니와 함께 전화 교환수로 일하던 19살의 키프는 어느 날 이웃에 살던 화가 로크웰의 모델 제안을 받는다. 이틀 간 그림 모델을 서고 그가 받은 돈은 10달러. 첫날 하얀 블라우스와 단화를 신고 간 그녀에게 로크웰은 청색 작업복과 운동화를 신고 와 달라고 청했고, 그림을 완성한 뒤 “그림이 실제와는 꽤 다를 테니 많이 놀라진 말라”고만 말했다고 키프는 2002년 AP 인터뷰에서 말했다. 키 172cm에 몸무게 45kg이던 키프의 그림 속 변신에 친구와 주민들은 짓궂은 농담으로 그를 놀렸지만 그들도 키프 자신도 그림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로크웰의 ‘리벳공 로시’는 2002년 경매에서 한 개인 수집가에게 490만 달러에 팔렸고, 지금은 아칸소의 크리스탈브리지미술관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로크웰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대성당 천정화 속 ‘이사야’의 포즈를 본떠 가공의 로시를 창조했다고 했지만, 리벳공 로시의 모티브는 한 해 전인 1942년 하워드 밀러(Howard Miller)의 그림 ‘We Can Do It!’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당시 웨스팅하우스에 고용돼 기업 홍보물을 그리던 밀러는 사내 사기 진작용으로 팔뚝을 세운 여성 노동자 그림을 그렸지만 대외적으로 큰 반향을 끌지는 못했다. 17세 한 여성 단조공이 모델이었다는 ‘We Can Do It’은 1980년대 초 우연히 세상에 알려졌고, 로크웰의 그림과 달리 저작권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어 여성운동 진영에서 널리 활용했다.
또 ‘리벳공 로시’라는 이름의 저작권은 포커 듀오 레드 에반스와 존 제이콥 로엡에게 있다고 해야 한다. 둘이 43년 초 발표한 노래 제목이 바로 ‘Rossi the Riveter’였다. “하루 종일 비가 오나 해가 드나 그녀는 조립라인에서 일하지~ 그녀는 역사를 만들고 승리를 위해 일하네~” 그들의 노래는 애국주의의 정조 속에 꽤 널리 불렸다. 로크웰이 자신의 그림 속 여성 노동자에게 ‘로시’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건 로크웰의 그림으로 하여 ‘리벳공 로시’는 전선의 ‘G.I Joe’와 짝을 이뤄 전시 여성 공장노동자 일반을 통칭하는 용어가 됐다. 공공장소에서 치마가 아닌 바지 차림의 여성을 보기도 드물던 것이 한두 해 사이 그림 속 로시가 입은 오버롤 작업복 차림 여성도 드물지 않게 눈에 띄게 됐다. 로시는 운동화를 신었지만, 43년 7월부터는 발등 부위에 철판을 넣은 여성용 작업화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14년 8월 워싱턴포스터는 실제 여성 리벳공들의 사연을 소개하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매주 단 하루 쉬는 날 없이 일하며 믿을 만한 베이비시터를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전선에 나간 남편(혹은 동생)의 목숨뿐 아니라 자신들의 손과 발등의 안전 걱정이 앞섰다는 이야기, 굵어진 팔을 드러내기 싫어 짧은 티셔츠는 입지 않았다는 이야기, 거칠고 열악한 근로 환경에 갑자기 노출되면서 청력을 손상 당한 사연도 있다.
2차대전의 저 변화에 대한 여성운동 진영의 판단은 엇갈린다. 혹자는 ‘미국 여성사의 전환점’으로 평가하는 반면 차별의 장벽이 일시적으로 낮아진 것일 뿐 여성 지위와 노동 기회에 영속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자유를 위한 탄생 337쪽) 연합국의 승리로 종전이 임박했던 44년 말부터 미국 정부는 여성 노동자 동원 캠페인을 중단한다. 적지 않은 여성 노동자들은 종전 후 가정으로 되돌아가거나 저임금의 전통적 여성 노동시장으로 밀려났다. 위키피디아는 ‘Rosie the Riveter’항목에서 키니 제니퍼 등이 쓴 을 인용, 47년 여성 노동자 비율은 전쟁 기간 최고 36%에서 28%로 줄었다고 썼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만 알던 여러 작업장에서 남성들과 대등하게 일하며 획득한 여성들의 자신감은 전선의 남자들이 귀국한 뒤, 또 상당수 여성 노동자들이 자의 반 타의 반 가정으로 복귀한 뒤로도 면면히 이어져 60년대 여성운동의 에너지원이 됐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전쟁 중 노포크의 한 조선소에서 전함 수리공으로 일했던 웨스트버지니아 작은 탄광마을 출신 매글리아노 허트(2014년 당시 89세)는 “탄광촌에 머물렀다면 상상할 수도 없었을 넓은 세상에 대한 관점을 (전시 노동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일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그 체험을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과 나눴다”고 말했다.(WP, 2014.8.10) 미국 의회도서관 온라인 아카이브(www.loc.gov/vets) 의 참전용사 증언 항목에도 그들의 육성이 기록돼 있다. 미 의회도서관 디지털 잡지‘Journeys and Crossings’ 2010년 7월호에는 그 중 한 여성의 이런 증언도 실렸다. “내 엄마는 내가 일을 하게 되면 결코 평범한 주부로 되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어요. 그녀가 옳았어요. 보잉사에서 일하면서 나는 자유를 발견했고, 그 전까지는 결코 알지 못했던 독립을 발견했죠. 전쟁이 끝난 뒤 나는 주부클럽에서 브리지게임을 즐기는 주부로 되돌아갈 수 없었어요. 전쟁이 나를 완전히 바꿔 놓았죠.”(이네즈 사우어, 보잉사 근무)
1998년 미국 리벳공 로시 위원회(The American Rosie the Riveter Association)가 만들어졌다. 각자의 경험을 기록하고 그 가치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설립된 이 단체는 여성주의와 애국주의의 묘한 결속감을 과시하며 지금도 강연과 저술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9ㆍ11 직후 ‘리벳공 로시’를 비롯한 노먼 로크웰의 주요 작품들은 미주 전역을 돌며 순회 전시됐다. 2001년 11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에는 10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그의 작품을 관람하는 성황을 이뤘다. 큐레이터 비비앙 크린은 “로크웰의 작품들이 지닌 애국주의와 미국적 삶에 대한 찬미가 관객들의 욕구에 부합한 것 같다”고 한 잡지 인터뷰에서 말했다. 당시 구겐하임의 홈페이지를 장식한 그림도 ‘리벳공 로시’였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또 2차대전의 숨은 공로자로 리벳공 로시의 사연이 언급될 때마다 키프의 이름은 곁두리처럼 소개되곤 했는데, 그는 조금은 쑥스럽고 또 조금은 뿌듯했던 듯하다. 키프가 AP와 인터뷰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는 “나는 그 일(모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나 자신을 현대 여성의 상징 같은 존재로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또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로크웰의 그림이 잡지에 실리기 전까지 나는 그 그림을 보지도 못했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버몬트 주 템플대에 진학, 치위생사 학위를 받고 고향 베닝턴에서 치위생사로 일했다. 49년 결혼해 네 명의 자녀를 두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림이 그려진 지 24년 뒤인 1967년 로크웰은 키프에게 사과 편지를 쓴다. 날씬한 몸매를 우람하게 그려 미안하다고, “그 때는 ‘거인 같은’ 여성상이 필요했다”는 거였다. 그림 자체가 아니라 남성 지배 사회가 대상화한 여성, 즉 필요에 따라 모범적 여성상을 상정하고 닮게 하려 한 관행에 대해 반성하고 전체 여성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걸 사회가 깨닫기까지는 또 긴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사회)도 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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