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상황 왕조시대 폭군 공포정치 방불
여과없는 첩보 공개 바람직한지 의문
국정원 차분하게 실상 파악 전념해야
쾌도난마(快刀亂麻). 어지럽게 뒤섞인 일을 명쾌하게 처리한다는 뜻이다. 이 고사성어의 주인공은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北齊)를 세운 고양(高洋)이란 인물이다. 북제의 전신 동위(東魏)의 승상이던 아버지가 아들들을 모아놓고 뒤얽힌 삼실 한 뭉치씩을 나눠주고 추려보라고 했다. 다른 아들들이 한 올씩 추리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을 때 고양은 “어지러운 건 단번에 베어버려야 한다”고 잘 드는 칼로 싹둑 잘라버렸다.
과연 그는 동위의 어지러움을 정리하고 권력을 잡더니 선위를 받아 북위의 첫 황제가 되었고, 과단성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나라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술에 취하면 살인광이 돼 곁에 있는 사람을 아무나 칼로 베어 죽였다. 생각다 못한 중신들은 그가 술을 먹을 때는 사형수를 옆에 대기시킬 정도였다. 첩(妾) 등 주변사람들을 의심해 잔인하게 죽이기도 했다. 그래서 쾌도난마는 원래 폭군의 잔인한 공포정치를 이르는 말로도 쓰였다고 한다.
국정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지금 북한 권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왕조시대 폭군의 공포정치 상황과 다를 게 없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은 4월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을 만나는 등 중요 임무를 수행했고, 4월 27ㆍ28일 열린 모란봉악단 공연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함께 관람했다. 그런 그가 3일 만인 30일께 처형됐다. 이렇다 할 재판절차도 없이 사실상 즉결처분 됐다는 얘기다.
처형 정황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저고도비행체 격추에 쓰는 무기인 고사총으로 수 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시신은 거의 분해돼 수습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화염방사기로 태웠다는 얘기도 나왔다. 우리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인민무력부장을 이렇게 잔인하게 죽인 게 사실이라면 김정은 체제의 포악성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고모부이자 아버지 시대의 2인자인 장성택, 자신의 후계 확정과정에서 군 최고실세로 급부상했던 이영호 북한군 총참모장 처형 등 김정은이 집권 후 잔인하게 처형하거나 숙청한 북한 고위인사가 70여명에 이른다고 국정원은 집계했다. 최고위급 간부들은 물론 중앙당 과장과 지방당비서 등 중간 간부들까지도 처형되고 있다는 게 국정원 측 얘기다.
이게 다 사실이라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김정은의 통치는 공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군 고위간부들의 계급장을 뗐다 붙였다 하고 권력서열을 수시로 바꾸면서 당과 군을 장악해왔다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국정원이 고위 인사 처형 등 북한 내부에 어떤 변고가 있을 때마다 언론 특종 터뜨리듯 여과 없이 공개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이다.
현영철은 처형됐다는 지난달 30일을 기준으로 3주가 지났는데도 북한 기록영화와 매체 등에 삭제되지 않고 등장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그가 처형된 게 아니라 지방 모처에서 ‘혁명화 교육’ 중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고사총이 아니라 기관총으로 처형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국정원 스스로 확인된 정보가 아닌 ‘첩보’라고 한 자락을 깔면서도 실제 파악된 사실보다 훨씬 더 충격적으로 스토리를 부풀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정은이 측근들을 함부로 처형하고 무자비한 공포 정치를 펼친다고 해서 북 체제가 곧 무너질 것으로 기대하고 방관할 수는 없다. 지금 국정원이 해야 할 일은 그런 상황을 선정적으로 국민에게 알리기보다 정확하게 실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공포정치가 김정은 개인 변덕과 포악한 성정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수많은 왕조에서 봤듯이 새로운 권력자가 자신의 기반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냐에 따라 우리의 대응은 달라진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 발표에 근거해 북한의 “극도의 공포정치”를 언급했다가 북측으로부터 다시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한 맹비난을 샀다. 통일부는 개성공단 최저임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개성공단 남북공동위원회’를 20일 열자고 북측에 제안했다가 바로 거절당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남북대화니 통일이니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차분하게 정확한 북한 상황을 파악해 정부가 문제를 풀어갈 여건을 조성하는 게 국정원의 진짜 임무가 아닐까.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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