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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할 때 동의서도 못 써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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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할 때 동의서도 못 써 줘요"

입력
2015.05.2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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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커플처럼 주말엔 가족모임 가고

친척 결혼식에도 참석, 떳떳하게 부부로 다녀

혈연·결혼·입양에 의한 관계만 가족 안정돼…

성소수자들의 박탈감 해소되는 날 왔으면

동성배우자와 살고 있는 천정남씨가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한 바에서 동성부부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토로하면서 직접 만든 혼인신고서를 소개하고 있다. 이명현 인턴기자(숙명여대 미디어학부4)
동성배우자와 살고 있는 천정남씨가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한 바에서 동성부부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토로하면서 직접 만든 혼인신고서를 소개하고 있다. 이명현 인턴기자(숙명여대 미디어학부4)

“어딜 가도 내 배우자라고 떳떳하게 말합니다. 우린 부부니까요.”

21일 법정기념일인 ‘부부의 날’을 맞아 세상 모든 부부가 서로의 결합을 다시 한번 되새기지만 한 지붕 아래 같은 이불을 덮고 자면서도 부부로 불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지 않은 국내에서 ‘동성부부’로 살아가는 커플들이 그 주인공이다.

두 살 연상의 동성배우자 A(47)씨와 살고 있는 천정남(45)씨는 자신 있게 A씨와의 관계를 부부로 규정한다. 2001년 첫 만남 후 1년 만에 동거에 들어간 이들은 벌써 14년째 한솥밥을 먹고 있다. 혼인서약이나 결혼식 같은 절차는 따로 없었다. 천씨는 “같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배우자로 여기며 함께 하자고 했으니 누가 뭐래도 우린 부부”라고 했다. 2003년 천씨의 생일에는 A씨가 구청에서 가져온 혼인신고서 양식에 둘의 이름을 적은 후 액자로 만들어 깜짝 선물을 안겨 주기도 했다.

동성부부지만 부부생활은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말이면 함께 TV를 켜놓은 채 치킨을 먹고 여느 커플처럼 부부모임에도 빠지지 않는다. 친척의 결혼식이나 가족모임에도 가족의 자격으로 참석한다. 천씨는 “마트나 백화점에 가도 주위 시선을 의식해 배우자의 손을 놓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동성부부이기에 가지는 장점도 있다. ‘일하는 남편, 요리하는 아내’ 같은 전통적 성 역할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한 명이 밥을 지으면 다른 사람은 자연스럽게 설거지를 하고 한 쪽이 청소기를 돌리면 다른 쪽은 물걸레를 잡는다. 천씨는 “같은 연배 남성으로서 살아온 배경이 비슷해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이성보다 높다”고 했다.

하지만 법의 울타리 밖에 있어 부부의 권리를 누리지 못할 때는 사회적으로‘남’일 수밖에 없다. 천씨는 지난해 초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게 돼 수술 동의서가 필요했지만 A씨는 법적 배우자가 아니어서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결국 천씨는 부산에 있는 누나에게 부탁해 간신히 수술을 받았다. 지난해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인 ‘친구사이’가 LGBTI(게이 레즈비언 등 성소수자) 3,15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시급한 권리로 ‘수술 동의 등 의료 과정에서의 가족 행사 권리’(67.5%)가 꼽혔다. ‘국민건강보험 부양-피부양 관계 인정’(44.6%)이 뒤를 이어 배우자를 지켜줄 수 있는 권리를 원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2년 반째 여섯 살 연상의 동성배우자와 함께 살고 있는 호림(28ㆍ여)씨는 “부부의 날 같은 기념일이 아직 내 것으로 다가오진 않는다”며 “성소수자들이 여전히 옆지기 짝지 애인 파트너 등의 어휘를 더 많이 쓰는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말했다.

원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지만 동성부부들 모두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사회적으로 인정해 달라고 입을 모은다. 동성부부 결혼의 합법화를 주장하며 소송까지 제기한 영화감독 김조광수(50)씨도 그 중 한 명이다. 2년 전 청계광장에서 동성애인과 공개 결혼식을 올린 후 서대문구청에 혼인신고를 신청했다가 반려당한 그는 지난해 부부의 날을 맞아 불복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6월이나 7월 중 첫 공판이 열릴 예정인 이번 소송의 향방에 수많은 성소수자들의 이목이 쏠려 있는 이유다. 김 감독은“우리나라는 혈연 결혼 입양 등에 의한 관계만 가족으로 인정해 성소수자들에게 적용되는 가족의 개념이 없다”며 “최소한 우리가 겪는 박탈감에 대해서만이라도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준호기자 junho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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