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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국가가 말을 건네는 방식

입력
2015.06.0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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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가는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았다. 정부는 메르스의 전염성이 낮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방역의 책임을 국민에게 떠 넘겼다. 메르스로 인해 혼란이 생기는 것은 두려워했지만, 대비책을 마련하는 데는 무능했다. 메르스가 빠르게 전파되면서 흉흉한 소문이 돌자, 이번에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사람을 처벌한다고 윽박지르고 있다. 그러나 혼란은 유언비어로 생긴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국가는 국민에게 정직하지 않았다. 대운하를 만들지 않겠다고 하고선 이름만 바꿔 4대강 사업을 했던 지난 정부의 경험을 되살릴 필요도 없다. 겉으로는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하고선 시행령을 이용하여 법률의 내용을 마음대로 고친 지금의 정부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인가 관료들은 국민의 뜻을 묻고 국민의 질문에 답하기 보다는 임면권자의 말에만 귀 기울이고 그 질책을 두려워하고 있다. 정부가 국민의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지 않는 상황에서 메르스에 대한 국가의 철저한 대처는 뒤로 미뤄졌다.

메르스 사태의 진행 과정에서 국민은 국가로부터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정부의 지시에만 따라야 하는 수동적 지위에 놓여 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 사회에서 국민은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국가에 복종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거리에는 국민의 행동을 금지하는 지시만 존재할 뿐, 국민에 대한 설명과 그 판단을 구하는 요청은 사라졌다. 지난 수년 동안 국민은 이런 모욕을 경험하고 있다. 자신이 낸 세금으로 학교 급식을 한다는 데 동의한 많은 국민들이 순식간에 무상급식을 국가에 애원하는 처지가 된 것도 최근이었다. 메르스의 전염성이 낮다는 국가의 말을 믿었던 국민은 이제 외국인들로부터 무책임한 한국인이라는 모욕을 겪고 있다.

국민은 국가로부터 설명을 듣고 판단할 자격과 권리를 갖고 있다. 국민은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국가를 형성하고 결단하는 주체이다. 그것이 우리가 운영하는 민주주의의 요체이다. 관료가 국가적 현안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대상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다. 정부는 국민의 질문에 귀 기울이고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국민은 부모가 주는 대로 먹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주권자이다. 정부는 숨기고 윽박질러 겉으로의 평온함을 구해선 안 되고, 성실하게 설명하고 의논하여 국민의 합리적 판단과 협조를 구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은 국가가 국민을 바라보는 마음가짐과 이어져 있다. 지금 국가가 국민에게 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라는 선의(善意)에 기초했다 하더라도, 국민을 통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국민은 국가의 그런 마음가짐을 알기 때문에 더욱 불안한 것이다. 메르스 사태 초기에 드러난 정부의 책임 회피 또는 무능함을 모를 만큼 국민들이 어리석지는 않다. 메르스 확산의 원인이 단지 몇몇 무책임한 개인이 감염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지금 국가에겐 국민을 주권자로서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국가는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예의를 갖춰 국민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 메르스로 사망한 국민에게 기존 질환이 있었던 사정만으로 국가가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국가는 병명(病名)과 치료 방법을 알지 못한 채 병원을 전전했던 당사자와 유족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며 그들에게 그리고 아이와 가족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메르스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바를 설명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방역 체계와 의료 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되찾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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