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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주트의 마지막 경고 "다시 공포의 시대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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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주트의 마지막 경고 "다시 공포의 시대 진입"

입력
2015.06.1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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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워 1945~2005' 저자 세상 떠나기전 동료 역사가와 대담

"실제의 위험과 가공의 위험에서

개인을 보호하고 사회통합할 장치는 사회민주주의다"

20세기를 생각한다/ 토니 주트ㆍ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 조행복 옮김/ 열린책들 발행ㆍ520쪽ㆍ2만5,000원
20세기를 생각한다/ 토니 주트ㆍ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 조행복 옮김/ 열린책들 발행ㆍ520쪽ㆍ2만5,000원

공동 저자인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가 서문에 요약한 대로 “이 책은 역사이자 전기이며 윤리학 논문이다.” 2010년 세상을 떠난 영국 역사학자 토니 주트가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던 말년에 그의 집으로 찾아가 나눈 대담을 녹취해서 총 9장으로 편집했다. 역사학자 개인의 전기와 역사를 결합한 독특한 이 책은 “주트의 지적 전기이면서 정치사상의 한계(그리고 쇄신 능력), 정치 영역에서 지식인들의 도덕적 실패(그리고 의무)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다.“

두 사람이 2009년 1월 대화를 시작했을 때 주트는 이미 글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이 책의 후기를 구술하고 몇 주 뒤 눈을 감았다. 마비된 몸으로 오직 기억에 의존해 구술했지만, 놀랍도록 정확하고 예리하게 자신이 살아낸 20세기를 돌아보고 진단하며 역사학자와 지식인의 역할을 설파했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
역사학자 토니 주트.

주트는 전후 유럽에 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는 ‘포스트워 1945~2005’의 저자이자 에릭 홉스봄, 슬라보예 지젝, 이매뉴얼 월러스틴 같은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들에게도 비판의 날을 가차없이 들이댄 평론가로 유명하다.

“지식인에게는 들어가는 통로와 나오는 통로가 있다. 들어가는 통로는 독서, 관찰, 이해, 학습이다. 그러나 나오는 통로는 그의 청중이다. 청중이 없다면 허공에 대고 소리칠 뿐이다. 문제는 ‘세계적인’ 독자 따위는 없다는 데 있다. (중략) 당신의 진정한 청중은 당신이 이바지하는 특정한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독자층이다. 그 논쟁의 배경 속에서만 작가는 영향력과 지속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지식인’ 같은 건 없다. 그 반대의 꼬리표는 있을지언정. 슬라보예 지젝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에서 나는 세계체제론 따위에 늘 회의적이었다.“(379쪽)

인용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사회 참여 지식인이고 학계의 싸움꾼이었다. 역사학자 홉스봄도 공산주의의 죄과를 묻지 않았다는 이유로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 책의 서평에서 홉스봄은 “현대의 역사가들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자 “훌륭한 한 인간과 그가 살아 내고자 했던 삶을 기록한 값진 기념비”라고 썼다.

이 책의 각 장은 주트가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자전적 전기로 시작한다. 동유럽 유대인 이민자의 후손으로 런던에서 태어나 자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는 긴 이야기에 20세기 유럽사가 겹치면서 장대한 지적 지형도를 펼쳐 보인다. 역사뿐 아니라 사상, 철학으로 뻗치는 전방위적 지식과 정신 근육을 총동원해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버겁지만, 여러 번 읽고 관련 도서를 참고해서라도 독파할 가치가 충분하다.

이 책에 담긴 풍성한 논의는 주트의 다양한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청소년기 한때는 헌신적인 시오니스트였고 청년시절 한때는 마르크시스트였던 지식인, 프랑스사에 정통한 영국인 역사학자, 폴란드 지식인과 교제하고 체코어를 아는 서유럽인, 뉴욕에서 유럽을 연구하는 연구소를 이끈 학자, 동료 역사가들에게 채찍을 든 역사가. 전부 주트를 가리키는 설명이다.

내부자이면서 동시에 아웃사이더였던 주트는 20세기 서구 정치사상사를 짚어가는 여정의 끄트머리에서 사회민주주의를 강력하게 옹호한다. 홀로코스트, 시오니즘과 그 유럽적 기원, 파시즘과 반파시즘, 마르크스주의에 매혹된 지식인들과 그들의 환멸, 국가의 역할을 둘러싼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대결 등 20세기 정치사상의 중요한 현장을 관통한 끝에 도달한 결론이다.

미국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재현된 강제수용소행 수송열차 칸.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이런 물품이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전용됐다며 "역사가 없다면 기억은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경고한다. 위키피디아 사진
미국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재현된 강제수용소행 수송열차 칸.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이런 물품이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전용됐다며 "역사가 없다면 기억은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경고한다. 위키피디아 사진

책 말미에서 주트는 “우리는 다시 공포의 시대에 진입했다”고 경고하며 공공선의 정치를 강조한다. 부시 정권 8년 동안 미국에서 벌어진 정치적 풍경, 이를 테면 9ㆍ11 이후 폭발한 ‘애국적 외설’을 환기시키면서 ‘공포를 동원해 선동적으로 악용하는 데만 호소하는’ 권력을 비판한다. “사회민주주의는 개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실제의 위험과 가공의 위험에 맞서 그들을 보호하는 장치일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 통합을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공격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장치일 수 있다“는 것이 주트의 판단이다.

책의 제 7장에서 주트는 “기억으로 역사를 대신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하는데, 한국에도 시사점이 크다. 과거를 기억으로 표현하는 것은 편파적이고 선별적이기 때문에, 역사가 없다면 기억은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파적 이해에 따라 입맛대로 구성한 기억으로 과거를 기념하려는 준동은 지금 이 나라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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