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와 친교의 장에서 술만큼 위력적인 매개물이 또 있을까. 모든 축하, 기념, 한탄의 상에 술과 잔이 빠지지 않는 것은 취기가 주는 해방과 도취감 때문일 터. 백약(百藥) 중 으뜸이자, 때로는 원수이며, 교회에서는 ‘주님의 피’이기까지 한 술의 헤어나오기 힘든 매력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뉴질랜드 출신 와인 칼럼니스트이자 칼턴대 역사학과 교수인 로드 필립스의 ‘알코올의 역사’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풍경 속 술의 자취를 복원한 책이다. 저자는 술과 종교, 술과 계몽, 계급과 질서 등 굵직한 주제 아래 시대별 술의 모습을 설명한다.
인간이 술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9,000년 전. 하지만 인류 첫 취기의 경험은 그보다도 수 만년 전이다. 익은 과일이 자연 발효되며 3~5%에 달하는 알코올성분이 생성됐고, 인류가 이를 마셔왔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전 계층의 사랑을 독차지해온 술의 양대 산맥은 단연 와인과 맥주다. 비축해 둔 곡물로 1년 내내 만들 수 있었던 맥주와는 달리, 쉽게 재배하고 보관하기 어려운 포도로 만든 와인은 희소성 때문에 꽤 오랫동안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분류됐다.
술이 주는 몽롱함과 혼미함을 맛본 사람들은 이내 술을 영적이고 종교적인 물질로 이해했다. 그리스도교는 술을 하나의 상징이자 의례의 중심적 물질로 격상시킨 데 비해, 이슬람은 술을 철저히 금지하는 등 전혀 다른 방식으로 술에 의미를 부여했다.
곳곳에서 무절제, 폭력, 나태 등을 유발하기도 한 술은 다양한 시대에서 금주령을 유발했다. 하지만 여성과 식민지 원주민들에게 주정뱅이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탄압이 시도되는 등 술에 대한 비난과 핍박이 늘 온당했던 것은 아니다.
필수 물자, 지배수단, 화폐 등으로 기능해 온 술의 역사를 펼쳐 낸 저자는 우리가 ‘포스트 알코올 시대’라 할 만한 술 저소비 시대에 진입할 것이라는 뜻밖의 전망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20세기 이후 많은 서구국가에서 술 소비량이 눈에 띄게 줄었으며, 특히 젊은 세대 앞에는 술을 대신할 더 유혹적인 카페인과 강장제가 즐비하다는 이유에서다.
여전히 폭탄주 레시피를 준수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과일향 소주의 풍미에 새로 매료되기까지 한 한국독자들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를 결론이다. 우리 삶에서 연애와 영업과 스포츠가 절멸하지 않는 한, 술은 여전히 가장 사랑 받는 상품이자 가장 논쟁적인 상품의 지위를 누릴 것이 자명해 보이기에.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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