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판에 대학·과 이름 새겨넣고 동기애·소속감 느끼는 단체복
점점 학벌 과시 수단으로 변질, 서로 우월감·열등감 주고받아
이름 지운 초라한 과잠까지 등장
회색 점퍼의 밋밋한 뒷모습이 왠지 우울하다. 경기권의 한 전문대 학생들이 올해 초 만들어 입은 과잠(과 점퍼) 등판엔 아무 표시도 없다. 학교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내세운 과잠이 흔한 요즘 '어느 학교 무슨 과' 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과잠은 낯설다.
말 그대로 과잠이란 과 구성원간의 동일성과 소속감을 높이기 위해 입는 단체복이다. 통일된 디자인의 과잠은 새내기 배움터나 MT 등 주요 행사 때마다 끈끈한 동기애를 키우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야구점퍼 형태라서 실용적인데다 입을 옷이 마땅치 않을 때 부담 없이 입을 수 있어 좋다. 타 대학 타 학과와의 차별성을 위해 등판 상단에 학교 이름, 하단엔 학과 이름을 달고 왼쪽 앞가슴엔 학교 영문 이니셜, 소매엔 휘장이나 학번, 본인 이름 등을 새겨 넣는 게 보통이다.
약 10여 년 전 몇몇 명문대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과잠 패션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점차 학교 간판, 즉 학벌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수단으로 변해갔다. 언제부턴가 다른 학교 과잠과 마주치면 한쪽은 우월감을 다른 한쪽은 열등감을 느끼는 일도 자연스럽다. 같은 학교 내에서도 잘 나가는 학과와 변두리 학과는 과잠에서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창피해서든 비교 당하기 싫어서든 학교 이름을 지워버린 회색 과잠은 학벌지상주의와 맞닥뜨린 청춘의 자화상을 닮았다. 또한, 이른바‘서열패션’에 대한 소심한 부정이자 반항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과잠을 입는 순간 '입결'에 따라 학교 순위를 매기는 서열주의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 드는 것 같다고 털어 놨다. 과잠을 입는 때와 장소에 따라 자부심과 열등감 사이를 오간다는 대학생들의 속 얘기를 들어 봤다.
<용어설명>
과잠: 과 잠바(점퍼). 대학 이름과 학과를 표시한 단체복.
입결: 입시결과의 준말로 합격 커트라인 점수나 등급을 뜻한다.
▦이모(20)씨, 경기도 소재 S전문대 1학년
과잠에 학교 이름이…
“없어, 학교는 물론 과 이름도 빠졌지. 동기들이랑 과잠을 보면서 ‘우리 학교 인지도가 떨어지니까 일부러 안 넣었나 봐’라고 우스개 소리도 주고받았어”
과잠이 창피해?
“좋은 학교 과잠 입은 애들 보면 솔직히 부러워. 아무래도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한테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어? 창피하냐고? 만약 과잠에 학교 이름이 표시돼 있었다면 절대 안 입었을 거야”
과잠은 자부심 아닌가?
“글쎄, 과잠이란 걸 처음 받았을 때 자부심은커녕 그 어떤 감흥조차 없던데”
과잠은 서열패션?
“학벌에 대한 편견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해.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노력한 결과물이 바로 학벌이고 과잠이니까. 그렇다고 무조건 학벌만 중시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다들 그걸 쫓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느낌이야. 비록 전문대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해. 물론, 좋은 대학 간 친구들보다 힘들기야 하겠지. 그러니 더 노력해야 하지 않겠어?”
▦한모(23)씨, 경기도 소재 G대학교 3학년
과잠에 학교 이름이…
“응, 없어. 대신 등판엔 과 이름을 넣었고 왼쪽 가슴엔 학교 이니셜 ‘G’를 새겼지. 도안 결정할 때 누군가 ‘아예 잘 안 보이도록 검정 바탕에 검정 글씨로 하자’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는데 다들 ‘어, 그거 좋은데? 그래 그렇게 하자’라며 그 자리에서 결정했어. 왼쪽 어깨에 넣는 학교 휘장도 뺐어. 휘장이 있었으면 지금보다 더 안 입었을 거야”
과잠이 창피해?
“‘in 서울’학교 과잠 입은 애들 보면 사실 열등감 느껴. 전철 타고 학교 앞에 도착하면 접어둔 과잠을 꺼내 입었다가 집에 갈 때 다시 접어서 들고 간 적도 있어. 한 번은 전철 안에서 H대 과잠 입은 애들 만났는데 나도 모르게 학교 이니셜을 전공 책으로 가리게 되더라고. 괜히 부끄럽기도 하고, ‘쟤는 공부 잘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이런 걸 자격지심이라고 하나? 사실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과잠은 자부심 아닌가?
“경우에 따라 그렇기도 해. 수원역에 가면 천안권으로 통학하는 애들이 많은데 거기선 우리 학교 입결이 제일 높은 편이라 당당하게 과잠을 입지. 학교 내에서도 우리 과가 잘 나가는 편이라 과에 대한 자부심도 커. 그래서 과 이름은 빼먹지 않고 넣었어.”
과잠은 서열패션?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과잠을 보고 사람을 규정짓게 되는 것 같아. 길 가다가 명문대 과잠 입은 학생 보면 살짝 우러러 보이기도 하니까. 우리 대부분‘SKY’나 ‘인 서울’이란 말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면서 컸잖아.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은 ‘인 서울 대학을 가느냐 못 가느냐’로 대입의 성패를 따질 정도였지. 솔직히 학벌 좋은 애들이 능력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우리 학교에서도 열심히 하고 잘 하는 친구들 보면 간판으로만 따질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김모(22)씨. 서울 소재 H대학교 3학년
과잠에 학교 이름이…
“맞아, 같은 학교인데 과마다 달라. 우리 과는 문과라 학교 이름 아래에 ‘UNIV.’를 새겼는데 상대적으로 입결이 높은 공대는 ‘TECH’, 의대는‘MED’를 박아 넣더라고. 학교는 같아도 우리 과잠은 공대나 의대에 비하면 왠지 초라해 보여”
과잠이 창피해?
“약간… 그렇다고 학교가 싫은 건 아닌데, 가끔 우리 학교 앞에서 Y대 과잠 입은 애들 보면 ‘쟤들은 우리동네까지 서슴없이 오지만 우리는 신촌으로 못 가겠구나’라고 생각했어. 한 번은 어쩔 수 없이 과잠 입고 신촌 갔다가 머리카락으로 학교 이름을 가리고 다닌 적도 있어. 쟤들이랑 우리랑 수능 한 두 문제 차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괜히 억울한 느낌 같은 게 들더라”
과잠은 자부심 아닌가?
“물론, 우리보다 입결이 낮은 학교 과잠 보면 약간 으쓱해지긴 해. 또, 우리 학교랑 이름이 같은 여대가 있는데 가끔 여대라는 뜻의‘W(women)’가 빠진 과잠 입고 다니는 애들이 보여. 그러면‘쟤들이 홍대나 신촌 가서 우리 학교 학생 행세 하겠지’라는 생각 때문에 짜증이 마구 날 때도 있어”
과잠은 서열패션?
“동의해, 나도 모르게 학벌중심, 서열주의에 끌려 다니는 현실도 고스란히 과잠에 들어 있어. 솔직히 내가 취업하고 싶은 분야의 경우 능력보다 학벌 위주로 뽑는 분위기야. 근데, 만약 내가 취업해서 채용하는 입장이 되도 이런 악순환을 반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 때 좀 더 좋은 과잠을 입어보기 위해 편입도 시도해 봤지만 실패했어. 그래도 학벌 때문에 꿈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 작은 가능성이라도 몇 배로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으니까”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이명현 인턴기자(숙명여대 미디어학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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