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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정권 전방위 압박에도… 실세 장관 옷 벗긴 청렴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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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정권 전방위 압박에도… 실세 장관 옷 벗긴 청렴검사

입력
2015.07.05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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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노골적 수사방해ㆍ회유에도 증언ㆍ물증 낱낱이 수집해 전격 기소

평생의 신념 검찰중립… 후배들에게 오직 법과 양심에 따른 기소 강조

“청렴하기 때문에 강직할 수 있다.” 최대교(崔大敎ㆍ1901~1992) 검사가 남긴 말이다. 그는 오랫동안 검사의 직책에 있었으나 늘 가난했다. ‘냉수도 헹구어 마시는 사람’, 이것이 주위 사람들의 평판이었다. 그는 쌀 한 가마를 살까말까 한 월급밖에 몰랐다. 때문에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부업으로 편지봉투를 만들어 생계에 보탰다. 자녀들은 수업료조차 제때 납부하지 못했다. 그래도 최대교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의 지위에 있었을 때도 그는 도시락조차 제대로 챙겨오지 못했다. 점심시간에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남몰래 누룽지로 허기를 때울 때도 많았다. 어느 날은 검찰청 출입기자들에게 그 장면을 들켰다. 그 바람에 ‘누룽지 검사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임영신 상공부장관 독직사건

최대교란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49년의 임영신 상공부장관 독직사건이었다. 임 장관은 일제시기 미국에 유학하였고, 그때부터 줄곧 이승만과 가까웠다. 이승만이 유학생인 그에게 청혼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1948년 8월 제1공화국이 출범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임영신을 상공부장관에 임명하였다. 측근인 그에게 대통령은 대미 경제교섭창구를 맡긴 것이다.

신생 대한민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물자에 크게 의존했다. 원조물자를 취급하는 상공부장관직은 그야말로 권력의 실세요, 노른자위였다. 대통령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지자 임영신은 장관 자리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국회 진출도 노렸다. 현직 상공부장관의 직권을 남용해가며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회에 입성했다.

임 장관에 관한 여론은 크게 악화되었다. 그의 독직사건은 서울지방검찰청의 수사 대상이 되었다. 평소 대쪽 같은 성품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최대교가 마침 서울검찰청의 검사장이었다. 최대교는 이 사건에 관한 수사를 진두지휘하여 임 장관의 혐의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자료를 다수 확보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임 장관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고 나섰다. 경찰에 명령을 내려 수사에 협조하지 못하도록 했다. 최대교 검사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집권층은 최대교 등에게 사람을 보내, 이 사건을 깊숙이 파고들면 보복인사를 단행하겠다고 협박했다. 사건을 담당하는 검찰측 인사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 들었다.

이런 경우 늘 그렇듯 부당한 압박의 이면에 달콤한 회유책도 마련되어 있었다. 수사를 적당한 선에서 유야무야 끝내준다면, 최대교에게는 법무장관 자리를 보장해주겠다고 했다. 휘하 검사들 역시 요직으로 영전시켜주겠다는 제안이 잇따랐다. 그러나 최대교 검사장과 동료검사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검찰중립 없이 삼권분립 어림없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법무장관을 개입시켰다. 정권 차원에서 임 장관에 대한 기소유예를 노골적으로 주문했다. 설사 임 장관이 부정부패 행위를 저질렀다 해도,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대외적인 체면을 위해서 그만 묻어두라고 하였다. 허다한 원조물자를 취급하는 상공부장관이 직권남용죄로 처벌될 경우, 미국은 한국정부를 불신하게 된다. 이것은 국익에 해롭다. 따라서 임 장관에 대한 수사는 한시바삐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 장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의 적극적인 비호를 방패 삼아 연일 큰소리를 쳤다. “어떤 경우라도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

그러나 최대교 검사장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임영신 장관의 비리행위를 입증하는 증언과 물증을 낱낱이 수집해 그를 전격 기소했다. 고집을 부리던 임 장관은 결국 현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법 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 이것은 근대적 법정신의 요체였다. 최대교는 난관을 무릅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은 달랐다.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임 장관은 무죄 석방되었다. 검찰중립이야말로 행정부에 대한 사법부 독립의 시금석이요,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삼권분립도 불가능하다. 이렇게 확신했던 최대교는 검사장 자리에서 축출되었다. 권력자의 눈 밖에 난 그는 변호사 개업을 서둘렀다.

임 장관 사건 이후 이승만 정권은 검찰에 대한 간섭을 더욱 강화했다. 검찰은 정권의 시녀로 전락하여 야당 탄압의 전위가 되었다. 누구든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체포와 구금을 면치 못했다. 행정부에 이어 사법부와 입법부를 무릎 꿇린 이승만은 초월적 독재자로 군림했지만 1960년 ‘4ㆍ19 학생혁명’을 만나 좌초하고 말았다.

“‘검사동일체’ 악용하는 고위간부가 문제”

중년에 최대교는 서울 변두리에 20여 평 낡은 한옥 한 채를 마련했다. 이 집에서 그는 평생을 살았다. 생의 마지막까지 사용한 변호사 사무실 역시 흔한 에어컨도 설치하지 않은 두어 평 좁은 공간이었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최대교의 삶을 가을 강(秋水)에 비유하며 그의 고고한 인품을 기렸다. “가을 강은 맑지만 부드러워 배 띄우지 못할 얼음강과 다르다오(秋水之淸淸而柔 不如氷江不可舟).”

최대교는 참으로 강직했다. 나라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주어 그의 노고에 보답했다(1991년). “법을 지키는 것이 인권옹호입니다. 사리사욕을 앞세워 법을 무시하면 그것이 인권유린인 동시에 국가발전을 가로 막는 저해행위입니다.” 훈장을 받은 소감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최고 권력자라도 성역이 있을 수 없다는 평소 신념을 표현한 것이다.

한국현대사는 정치적 중립을 상실한 채 권력의 눈치 보기에만 익숙한 검찰의 추태를 목격할 때가 많았다. 검찰 선배로서 최대교는 이를 몹시 안타깝게 여겼다. 특히 그는 검찰 고위간부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일선 검사들의 행위야 일일이 비난할 것이 못되고,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악용하는 고위간부가 문제다.” 권력자의 의중을 헤아리며 자신의 출세와 영달만을 생각한다면 검찰의 중립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검사는 기소권을 행사해야 한다. 집권세력의 거센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실세 임영신 상공장관을 기소 처분한 왕년의 최대교 검사장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말이다.

‘성완종 리스트’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검찰은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석 달 가까이 수사를 했다지만 결과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검찰은 140명 가량을 철저히 조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민들이 보기에는 과연 검찰에 수사 의지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당초 의혹이 제기된 정치인들에 대해 검찰은 계좌 추적도 하지 않았다. 정권 실세에 속하는 관련자들은 간단히 서면조사만 하고 넘어갔다. ‘유권무죄(有權無罪)’ 즉 권세만 있으면 지은 죄도 없어진다고 비꼬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

66년 전인 1949년에는 최대교처럼 강직한 이가 있어, 검찰중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 동안 세상 참 좋아졌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권력 뒤 내밀한 곳에서 여전히 풍기고 있는 이 악취는 도대체 무언가.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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