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축출로 여당 개혁보수 와해
국회법 폐기로 헌정사에 오점 남겨
역사 시계 거꾸로 돌린 박 대통령
지난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안철수, 문재인 후보 단일화 실패에 실망한 다수의 중도층 표를 끌어 모았다. 전통적인 야권의 의제를 차용한 효과를 톡톡히 봤다.
인간의 얼굴을 한 보수는 중산층과 서민에게 매력적이다. 국민 절반 가까이가 보수를 자처하고, 서민층도 보수세력이 경제적 고통 해소를 더 잘할 거라고 믿는 정치 지형에서는 더욱 그렇다. 수구보수 색채 탈색은 팽팽한 보수ㆍ진보 대결 구도로 진행되는 선거에서 무게 추를 보수 쪽으로 기울게 한다. 전략화만 잘하면 일본 자민당 장기집권 같은 보수정권 공고화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유승민은 새누리당의 수구보수 이미지 탈피에 딱 맞는 인물이다. 좋은 집안에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주류 경제학자라는 배경부터가 이목을 사로잡는다. TK출신이지만 대통령에게 거의 유일하게 쓴 소리를 쏟아내는 정치인이라는 점도 강점이다. 그런 정통 보수정치인이 서민과 중산층 편에 서겠다는 데 혹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설혹 그것이 보수의 위선이라 해도 그 자체만으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다. 야당으로부터 “보수가 갈 길을 보여준 명연설”이라는 극찬을 받은 유승민의 국회 연설은 새누리당이 진보 어젠다를 또다시 선점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각종 공약 파기와 세월호 참사, 비선논란 등으로 이반된 민심을 되돌릴 절호의 계기였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스스로 기회를 걷어찼다. 유승민을 파문한 국무회의 발언은 현 정권과 집권여당의 정체성 선언이다. ‘개혁보수’‘신보수’‘건강한 보수’를 팽개치고 ‘꼴통보수’로의 회귀를 만천하에 공표한 정치행위다. 분칠, 회칠 다 지우고, 거추장스럽고 몸에 맞지 않는 옷 벗어 던지고 오로지 내 갈 길을 간다는 포고령인 셈이다. 당장이 급한 박 대통령은 총선이고, 대선이고 생각할 겨를이 없다. 빈손으로 끝날 것 같은 조급증과 강박감에 앞뒤 잴 계제가 아니었다. 권력에 대들거나 앞길을 방해하는 이는 누구든지 제거해야 한다는 결기가 가득했다.
박 대통령의 호령에 깨춤을 춘 친박들은 꼴통보수의 전위대일 뿐이다. 보수혁신은 안중에 없고 보스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계파 조직원으로서의 충성심만 존재한다. 당의 헤게모니를 탈환하고 총선 공천권을 확보하자는 생각밖에는 없다. 입만 열면 경제살리기니 민생이나 하지만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겠다는 철저한 계산 속에서 움직인다.
새누리당 개혁을 주장해온 다수 의원들의 침묵은 더 한심하다. 새누리당 개혁ㆍ소장파 세력은‘꼴통보수’와 ‘개혁보수’의 대회전에서 지리멸렬했다. “낡은 보수의 시대를 끝내고 중도혁신의 신보수 시대를 열어가자”던 쇄신파의 다짐은 한갓 구호에 불과했다. 입으로는 보수혁신을 말하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 나약한 보수주의자들의 한계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각자가 자율적인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자존심과 책임을 팽개쳤다. 새누리당의 표결 불참으로 국회법 개정안이 폐기된 어제는 우리 정치사에 중대한 오점을 남긴 날로 기록될 것이다.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에서 보듯 미국 사회는 문화적 전환기를 관통하고 있다. 백인우월주의와 서구적 전통에 기반한 기존의 질서가 퇴조하고 새롭고 다양한 가치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공화당 주류조차 시대적 흐름을 체감하고 보수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 1990년대 신보수주의 물결을 선도한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도 “우리는 새로운 진보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 미국이 쇠퇴하지 않고 끊임없이 건강성을 회복하는 원동력이 여기에 있다.
성장이 멈춘 우리 사회에서 보수의 혁신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불평등, 양극화, 청년실업, 성장과 복지 논란은 극단적 보수주의라는 낡은 틀로는 해결하지 못한다. 보수의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은 시대적 요구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막 움트고 있는 보수혁신의 싹을 도려냈다. 스스로 정치적 묘혈을 파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를 퇴보시키고 있다. 박 대통령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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