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닝맨 등 리얼버라이어티의 뿌리, 특정 소재 벗어나 호기심 자극
유재석·박명수·정준하 등 스타들 이탈없이 이끈 섬세한 여성적 리더
TV 예능의 역사는 MBC ‘무한도전’ 전과 후로 나뉜다. ‘무한도전’은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 시스템을 완전히 바꿨다. 요즘 흔하디 흔한 리얼버라이어티의 시작이 ‘무한도전’이었다. KBS2 ‘해피선데이’ 코너 ‘1박2일’도, SBS ‘일요일이 좋다-런닝맨’도 ‘무한도전’이 일군 예능 토양에서 자라났다. 한 두 대의 카메라로 예능프로그램을 찍을 때 ‘무한도전’은 출연자마다 카메라를 붙여 역동성을 살리고, 개인의 얘기에 살을 붙여 ‘드라마 같은 예능’을 보여줬다.
이 변화를 이끈 김태호(39) PD는 예능의 판도를 바꾼 개척자이자 ‘무한도전’을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획기적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성공했다는 점이 아니라 그 인기가 10년이나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0년간 끊임없이 시도하고 도전하며 ‘무한도전’을 진화시켜 온 김 PD는 혁신의 DNA가 내재된 ‘예능계 스티브 잡스’라고 할 만하다.
● 무한 진화가 낳은 기대감
한국일보 설문조사에서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영향력 큰 5위에 꼽힌 김 PD는 지난 10년 간 쉬지 않고 새로운 예능 실험을 보여줬다. 엉뚱한 퀴즈를 풀다가 카레이싱에 도전했고, 드라마(‘로맨스’)를 촬영하더니 가요제도 열었다. 나영석 PD가 여행(tvN ‘꽃보다 할배’)과 요리(‘삼시세끼’)에 천착했다면 김 PD가 연출하는 ‘무한도전’은 매회가 ‘특집’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새로움이 충만했다. 그의 ‘무모한 도전’은 시청자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기대감으로 이어졌으며, 충성도 높은 두터운 고정팬을 형성했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애플을 이끌었던 고 스티브 잡스의 창조경영처럼 김 PD의 예능 혁신이 예능에 새로운 시청자를 불러모으고 시장 자체를 키웠다”고 봤다. 그가 뿌린 예능의 씨앗은 이제는 고전이 된 리얼버라이어티(‘런닝맨’ 등)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새롭게 등장한 1인 TV 포맷(‘마이리틀텔레비전’)도 ‘무한도전’의 TV전쟁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정해룡 KBS 드라마국 부장은 “김 PD는 예능의 콘텐츠를 넓게 확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라고 말했다.
김 PD의 혁신은 대중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소재와 결합함으로써 ‘무한도전’이 ‘국민 예능’으로 자리잡았다. “예능이 지들끼리 웃고 떠든다는 말이 듣기 싫었다”는 김 PD는 용산 철거민 문제를 다룬 ‘여드름 브레이크’등 이 시대의 사회적 고민을 다루고, 평균 이하를 자처하는 멤버들을 직장인에 투영(시트콤 ‘무한상사’)시켰다. ‘해피투게더3’ 등에 참여한 모은설 작가는 “김 PD는 자신만의 콘텐츠를 통해 대중을 움직이는 독보적인 크리에이터”라고 평했다.
‘무한도전’의 콘텐츠 파워가 10년이 지나도록 이처럼 강력한 것은 가히 신화적이다. ‘무한도전’은 지상파 방송3사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한 ‘본방사수 예능 톱10’(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과 케이블채널 프로그램까지 합쳐 조사한 콘텐츠파워(CJ E&M &닐슨코리아)에서 올 상반기에 모두 1위를 차지했다. 10년의 세월 동안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 지고, ‘무릎팍 도사’도 종영했지만 ‘무한도전’만은 건재한데다 계속 앞서갔다.
이 영향력을 바탕으로 한 ‘무한도전’의 광고 단가는 1,182만원(15초 기준)으로, 지상파 방송 3사 예능을 통틀어 가장 높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이 포함된 ‘해피선데이’가 시청률은 더 높지만 광고 단가(1,014만원)는 못 미친다. 90분 방송인 ‘무한도전’에 15초짜리 광고가 최대 36개까지 붙는다고 하면, 김 PD가 이 프로그램으로 MBC에 벌어들인 광고수익은 1년에 약 221억원이 된다.
● ‘무한도전’ 브랜드 매니저
‘무한도전’은 유재석 박명수 정준하 하하 등 스타들이 이탈 없이 10년을 함께 해 온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JTBC 윤현준 PD는 “한 프로그램을 10년 이상 하는 건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가능한 배경에는 김 PD의 ‘낮은 리더십’이 있다.
‘1박2일’에서 나영석 PD와 일했었고 지금은 ‘무한도전’을 제작 중인 김란주 작가는 “김 PD는 메인 작가부터 막내 작가까지 항상 의견을 물어본다”며 “나 PD가 남성적인 스타일이라면, 김 PD는 매우 섬세한 여성적인 리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김 PD는 촬영장에서 큰 목소리를 내는 게 부담스러워,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면 휴대전화로 한다. 조연출의 자막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김 PD는 후배들 사이에서 ‘빨간펜 선생님’으로 불린다. 박명수의 매니저인 한경수 실장은 “아이템을 짤 때 출연자들에게 ‘재미있는 의견이 있으면 부탁한다’며 끊임없이 소통한다”고 귀띔했다. 이러한 소통은 업무 외적 관계부터 공고하다. 한 실장은 “김 PD는 출연자들은 물론 전 스태프의 경조사를 빠짐 없이 챙긴다”고 말했다. 김 PD 스스로도 자신의 역할을 “PD라기보다 출연자의 이미지도 관리해주고 개인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면 정리하는 데까지 도움을 주는 ‘무한도전’의 브랜드 매니저”라고 말한다.
김 PD의 사람을 향한 연출론은 프로그램에 독특한 생명력을 줬다. 기획에 출연자를 맞추는 게 아니라, 출연자에 맞춰 기획을 함으로써 ‘무한도전’ 멤버들만 할 수 있는 장면들을 뽑아낸다. 박명수와 정준하를 커플로 짝지은 ‘하 & 수’, 동갑내기 친구 하하와 전 멤버 노홍철이 맞대결한 ‘승부의 신’ 등이 대표적이다. H그룹 인사팀에 근무하는 한 관계자는 “드림팀이라 불리는 조직이 나쁜 성과를 낼 때가 있는데 평균 이하라는 멤버들이 자기 자리를 찾고 시너지를 내는 대목은 기업에서도 생각해 볼만한 이슈”라는 의견을 냈다.
다만 고정 시청자가 굳건하고 프로그램이 이들을 겨냥하면서 전 세대를 아우르지 못한다는 점이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된다. 새로 진입하려는 시청자들에 ‘무한도전’은 때론 ‘독해’가 필요하다. 지혜원 대중문화평론가는 “김 PD가 ‘무한도전'에서 추구하는 웃음이 평균 이하가 주는 웃음인데 사실 요즘 방송을 보면 메시지나 구성이 평균 이하 시청자가 즐길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라며 “예능의 유행을 선도해야 한다는 일종의 우등생 콤플렉스를 내려놓으면 오히려 편안한 웃음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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