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이 가장 달콤한 복수였다”는 말을 바네사 윌리엄스(Vanessa L.Willams)가 정말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삶이 저 말을 했다. 흑인 최초 뷰티 퀸(1984 미스아메리카)으로서 누리던 부와 영예를 누드 스캔들로 몽땅 잃었다가 노래와 연기로 스타덤에 복귀하기까지, 또 이후의 당당한 삶은 성공 복수 같은 저열해 보이기 쉬운 말을 우아하게 만들었다.
1984년 7월 20일은 21살 윌리엄스의 최악의 날이었다. 그날 미스아메리카조직위원회는 그의 자격 박탈을 공식 통보했다. 일체 대외 활동을 중지하고 차기 대회장에도 나오지 말라는 거였다. 83년 9월 미스아메리카에 뽑힌 뒤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모욕적인 메일과 살해 협박에도 의연했던 그는 사흘 뒤 기자회견에서 ‘왕관’을 벗었다.
앞서 남성잡지 펜트하우스 7월호는 창간 15주년 기념호(9월호)에 그의 누드사진을 게재한다고 예고했다. 선정적 보도와 대중의 저속한 상상력은 그를 마녀처럼 짓밟았다. 모든 광고ㆍ협찬을 잃었고, 연예계에서도 퇴출당했다. 몇 차례 시트콤 단역과 성인영화 출연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82년 시라큐스대 2학년이던 윌리엄스는 한 사진작가(톰 치아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던 중 그의 권유로 모델이 됐고 누드 컷도 찍게 된다. 그가 유명해지자 작가가 동의도 안 받고 사진들을 판 거였다. 첫 제안은 ‘플레이보이’가 받았다. 발행인 휴 헤프너는 “관심이 컸지만 권리 문제가 미심쩍었다. 우리는 제안을 거부했는데, 그녀가 최초의 흑인 미스 아메리카라는 사실도 감안했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말했다.
펜트하우스 9월호는 ‘Miss America, OH God! She’s Nude’ 라는 제목과 함께 문제의 사진을 실었다. 미국공영방송 PBS는 그 특별판으로 펜트하우스가 약 1,400만 달러를 벌었다고 추산했다. 펜트하우스는 이듬해 1월호에도 남은 사진들을 싣는다. 그 제목은, 비열하게도, ‘Oh God! I did it again’이었다.
윌리엄스는 87년 ‘The Pick up Artist’라는 영화로 재기했다. 88년 첫 음반 ‘Right Stuff(사진)’로 가수로도 데뷔, 타이틀곡 등 3곡을 단숨에 빌보드 차트 10위권에 올렸다. 91년 두 번째 앨범 ‘The Comfort Zone’은 220만 장이 팔렸고, 수록곡 ‘Save the best to last’는 5주간 차트 1위를 지킨다. TV 미니시리즈 ‘Ugly Betty’와 ‘위기의 주부들’에도 출연했다. 지금까지 그는 8장의 음반과 18편의 영화, 수십여 편의 드라마로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 빌보드의 수많은 상을 탔다.
2012년 자서전 ‘You Have No Idea’에서 그는 유년의 성적 학대와 10대 낙태 경험 등을 당당히 밝혔고, 여성운동과 동성혼법제화 등 동성애자 인권운동에도 앞장섰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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