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사 올해 바로 못하더라도 한일 수교 100주년을 맞는 해에는 일본 쪽에서 병합조약이 원천 무효였다고 선언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두 나라 관계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지난 18일 일본 교토(京都)시 도시샤(同志社)대 료신칸(良心館) 세미나실. 한국과 일본, 대만 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학술회의에서 한일문제 전문가인 장박진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날 학술회의의 주제는 ‘동아시아 기억과 미래-한일조약 50년, 해방/패전 70년’이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대만센터와 도시샤대 코리아연구센터가 주최해 한국에서는 고려대 정태헌 정일준 교수, 박정현 남광규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박세준 박사가,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 기자를 지낸 가토 지히로(加藤千洋) 도시샤대 교수, 한일문제 전문가 오타 오사무(太田修) 도시샤대 글로벌스터디연구과 교수, 이노우에 마사야(井上正也) 세이케이(成蹊)대 부교수, 문태승 조선대 조교, 대만에서 왕언메이(王恩美) 대만사범대 부교수, 차이퉁치에(蔡東杰) 중흥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이번 회의에서 장박진 연구원은 ‘한일병합조약 무효문제 재고’라는 발표에서 “한일병합조약 무효 문제는 한국으로서는 언젠가 시정되어야 할 과제임에 분명하지만 대의에 치우친 나머지 정치 전반에 대한 배려를 간과하는 것 역시 어리석다”며 “한국의 국력을 높이고 다양한 측면에서 신뢰 관계 구축을 통해 일본에 한일 관계가 한층 더 중요하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현실론을 폈다. 일본측 좌장을 맡은 오타 교수는 그런 고민과 해결의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아픔을 다독이고 그들의 이해를 구하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학술회의를 마친 뒤 한국측 좌장을 맡은 정태헌 교수의 사회로 오타 교수, 장 연구원이 한일 관계 현안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오타 오사무=좋지 않은 것은 맞다. 그렇지만 한편에서 미국의 역사학자들 중심으로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비판하는 담화가 나오고, 일본에서도 아베 담화와 관련한 성명이 나온 것처럼 좋게 볼 측면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정태헌=너무 정부에만 의지하지 말고 민간의 역사학자들끼리라도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한일 문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해결해가야 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좀더 조직적인 협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밑돌 쌓기 작업을 역사학자들이 하나하나 해서 협력의 폭을 넓혀갔으면 좋겠다.
장박진=한국의 시민사회가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한일 관계가 지금 극도로 나빠졌지만 시민 교류를 끊어버리자는 이야기가 그다지 많이 들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부 차원에서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위기다. 반대로 일본사회는 혐한(嫌韓) 분위기가 강화된다든지 해서 질적으로 변했다는 느낌이 든다.
정태헌=지난 20년을 돌아볼 때 한일 전문가로서 양국 교류에 어떤 변화를 느끼나.
장박진=교류의 횟수뿐만 아니라 관계 자체가 깊어지고 있다. 엊그제 일본에 오는데 같은 비행기에 한국 청소년 축구단이 단체로 탄 것을 봤다. 축구 한다고 일본 원정 오는 시대가 됐다. 20, 3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한국서 일본 오는 비행기 승객은 딱 두 부류였는데 일본인 아니면 재일동포였다. 비행기에서 오가는 말은 일본어뿐이었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양국 관계가 엄청나게 바뀐 것이다.
오타 오사무=한일 관계가 나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매주 한국 학자들을 만나고 이야기 한다. 사실 굉장히 좋아진 것이다.
정태헌=하지만 정부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게 과제 아닌가. 그런 점에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정부 차원에서 바뀌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닌가.
오타 오사무=정부 차원에서도 사실은 바뀌고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그렇다. 물론 지금 아베 정권에 기대할 건 없지만.
장박진=한국에 2002년에 왔는데 노무현 정권을 향해 좌경화했다는 사람들이 있더라.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하자는 정권을 왜 좌경화했다고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변화에 대한 과잉방어라고 느꼈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국제정세 등 여러 요인들에 대해 전후의 자유주의가 현실적인 타개책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중국의 대두라든지 환경이 바뀌고 있는데 헌법 9조 체제로 안심해도 되는가 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아베가 다른 대안을 내놓으려 하고 있다는 부분을 받아들이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요동을 거쳐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설사 그렇더라도 일본의 중심은 여전히 전후의 평화사상이다. 집단적 자위권을 말하지만 그건 기존의 개별적 자위권에 조금 보태는 수준이다.
오타 오사무=안보법제 개정은 중의원을 통과했지만 최종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9월까지 봐야 한다. 벌써 수만 명이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앞으로 이런 움직임이 계속되거나 더 확대된다면 국회 통과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정태헌=한일 협력의 미래를 열어 가기 위해 정치 지도자를 비롯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오타 오사무=일본에서는 한일 과거사 문제를 둘러싸고 이를 해결해야 한다거나, 식민지주의를 청산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운동이 분명히 있다. 그런 사람들과 아베 정부가 이른바 ‘기억을 둘러싼 싸움’을 벌이는 셈인 것이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 지금은 해결해야 한다는 쪽이 밀리는 상태다. 헤이트스피치(민족차별발언), 일본의 배외주의, 조선학교 정부 지원 제외 문제 같은 것의 뿌리는 역시 일본의 식민지주의다. 그것을 계속 비판하고 극복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기억을 둘러싼 싸움’에서 결국 지는 것이다.
장박진=연구자도 마찬가지이지만 언론의 경우는 같은 비판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날 똑 같은 얘기만 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때리기만 한다. 비판은 중요하지만 할 거라면 가능하다면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똑 같은 이야기만 해서는 소모적일 뿐이다.
교토=글ㆍ사진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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