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깍두기 학생 칼질 엄청 못합니데이. 달걀 지단 써는데 석 달 열흘 걸리겠심더.” “그래도 모양은 내가 훨씬 이쁘다.”
100시간 요리수업 내내 는 것은 고자질이었다. 고자질 대상은 나보다 세 살 많은 깍두기 형님이다. 헤어스타일이 직모에 스포츠머리여서 붙인 별명인데, 워낙 그럴듯해서 본명보다는 깍두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선생님, 이 형님 생선적 요리는 순전히 동태가 커서 잘된 겁니데이.” “(아니)꼽나? 꼬우면 큰 동태 고르지 그랬어. 푸하하.” 나머지 다섯 명의 수강생들은 요리삼매경에 빠져있는 시간에 우리는 끊임없이 티격태격했다. 요리강사는 그런 우리가 싫지는 않은 듯 “아이고 이제 그만 싸우고 요리에 집중하세요”라고 웃음 섞인 핀잔을 던지곤 했다.
깍두기 형님의 본명은 김재산. 국민일보 부국장으로, 대구경북 취재본부장이며 나에게는 언론계 선배다. 기자로 첫 발을 내디딜 때부터 줄곧 같은 취재권역에서 이십여 년을 선후배로 지낸 터라 형제나 다름없다.
그가 깍두기가 된 것은 시각적으로는 헤어스타일이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그는 일찍이 테니스에 입문했는데, 공을 같이 쳐본 사람들은 다 안다. 공을 사선으로 위에서 아래로 눌러 깎는 타법을 슬라이스라고 하는데, 그의 공은 변형 슬라이스다. 과장하면 공을 ‘U’자형으로 깎는다. 네트를 넘어온 공은 바닥에 바운스되자마자 타구 방향과는 상관없이 옆쪽으로 스핀을 먹고 꺾인다. 테니스 고수도 처음에는 그 공에 적응하기 힘들다. 공을 워낙 심하게 깎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깍두기가 된 것이다.
그 깍두기 형님이 바로 내 요리인생의 동반자다. 평소 “계란말이와 잡채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장담하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터라 요리를 배우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조건없이 포섭대상 1호였다. “성님, 요리 잘 해요?” “잘 하다마다.” “안 보이(보니) 아나. 그래봤자 몇 개 안될 텐데, 눈 딱 감고 요리 함 배워 볼랍니까?”
그렇게 시작했다. 동지가 생겼으니 요리강습 과정을 고르는 일만 남았다. 그때가 3월 초였다. 마침 그때 지역의 한 대학에서 ‘아빠를 위한 요리강습’ 강좌를 개설했다. 홍보담당자에게 문의했더니 평소 많이 해먹는 요리 10가지 정도를 가르친단다. 40, 50대 남성들이 주 대상으로 수업 분위기도 아주 좋다고 했다. “요리 초짜인 아빠들에게는 딱 맞는 과정”이라며 등록을 권유했다.
하지만 우리는 딱 잘라 거절했다. 요리를 대충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10가지 정도면 된장찌개에 불고기, 생선찜 정도일 텐데 그런 요리는 우리 어머니한테 배우는 것이 훨씬 좋겠다 싶었다. 한 번 배워놓으면 어떤 요리건 응용이 가능한 기본기를 다지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 또래 남성들이 모이면 요리보다는 뒷풀이 위주로 흐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안주가 눈 앞에 있으니 누가 발동을 걸어도 술자리가 커질 것이 뻔했다.
인터넷을 뒤지고 또 뒤졌다. 그렇게 눈에 띈 것이 한식조리사 과정이다. 모두 실업자나 구직자들을 위한 직업훈련교육이었다. 고용노동부에 문의해 보니 재직자도 조건을 갖추면 수강 신청이 가능했다. 강좌 개설 일주일 앞두고 고용노동센터란 곳을 다 가보게 됐다. 실직자과 구직자들이 즐비한 그 곳에서 우린 국비지원 신청을 위한 카드 발급을 마무리했다.
지난 3월 9일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한식요리수업에 입문했다. 조리대도 마주보고 잡았다. 깍두기 형님이 요리하는 모든 과정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처음 도마와 칼을 골라 들고 파, 마늘을 다져보니 김 선배 칼질은 느린데 모양은 항상 나보다 가지런했다. 난 항상 “요리가 왜 그렇게 늦냐”고 타박했고, 김 선배는 “요리가 왜 그 모양이냐”고 응수했다.
닭찜을 만들 때였다. 요리강사가 한창 레시피를 설명하며 메인 조리대에서 시범을 보이고 있는데도 김 선배는 혼자 딴청을 부렸다. 집에서 들고 온 당면을 뜨거운 물에 불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 이 학생 딴 짓 해요.” 알고 보니 김 선배는 이미 딴짓 하겠다고 사전 허락을 받아 놨다. 닭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그는 아예 그 시간에 잡채를 하겠다며 수강생 7명과 강사까지 8인분의 잡채를 만들었다. 덕분에 우리는 닭찜에다 잡채로 잔뜩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요리 자체가 사람을 몰입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돌이켜보면 석 달 가까운 수업을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깍두기 형님 덕분이다. 작심삼일까지는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초심이 흐려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때마다 깍두기 형님의 그늘이 컸다. 동반자의 힘이다. 그렇게 정신연령이 10대로 돌아간 듯 티격태격하며 웃고 떠들다 보면 어느새 요리가 뚝딱 만들어져 있었다. 요리교실은 동심으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었다.
가끔 주변 남성들이 묻는다. “나도 요리 한번 배워보고 싶은데, 우야면 좋노?” 내 대답은 이렇다. “눈 딱 감고 저질러 뿌이소. 뜻 맞는 동지 한 명 찾아서.”
전준호기자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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