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원유' 빅데이터 활용 산업, 은행·보험·카드사 마케팅에 국한
정보 활용 명확한 가이드라인 없어 "일단 정보보호 관련 땐 사업 포기"
A카드사가 지난해 실시한 사내 신사업 공모전에는 자동차 판매 컨설팅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자동차 회사가 신차를 출시할 경우 카드사의 결제정보 등을 활용해 적합한 고객군을 제공해주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동차 회사는 적은 비용으로 광고 효과를 높일 수 있고, 고객들도 관심이 있는 신차 정보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검토 단계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고객들의 정보를 외부(자동차 회사)와 공유하는 것이 개인정보보호 관련 법령을 위반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A카드사 관계자는 “금융산업의 특성상 워낙 민감한 부분이라 정보보호와 관련됐다 싶으면 일단 접고 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금융업은 ‘21세기의 원유’로 불리는 빅데이터(Big Data) 산업 중에서도 활용도가 가장 높은 분야로 꼽힌다. 은행, 보험, 카드사 등 고객들의 소비 패턴이나 취향 등 다양한 정보를 취합할 수 있는 업종인 만큼 빅데이터를 활용한 사업 기회가 무궁무진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국내 금융권의 빅데이터 산업 수준은 수년 째 걸음마 단계다. 마케팅 등 일부 활용 사례들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해외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인 데다 수익화에 성공한 모델은 전무하다. 무엇보다 개인정보 활용에 대한 규제가 모호하고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점이 금융회사들의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뒤늦게 금융당국이 규제 개혁에 나섰지만, 개인정보 활용의 범위와 법 개정 등을 둘러싸고 만만치 않은 논란에 휩싸인 형국이다. 전문가들은 향후 빅데이터 산업의 성장성을 고려할 때 개인정보 활용에 대한 명확한 규제 정비를 통해 금융사들이 과감한 투자에 나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26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지난달 3일 ‘금융권 빅데이터 활성화 방안’을 발표한 데 이어 9월 중 개인신용정보의 구체적인 활용지침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연합회 여신금융협회 등 5개 협회 관계자들이 논의를 진행 중이다. 개인 신용정보에 대한 지나친 보호가 빅데이터의 활용을 가로막고 있다며 본격적인 규제 완화 작업에 나선 것이다. 활용지침은 네거티브 방식, 즉 개인정보보호 차원에서 해서는 안 되는 사업이 구체적으로 제시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 같은 시도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힌 상태다. 우선 법 해석부터 혼선이 일었다. 정부가 밝힌 규제 완화의 핵심은 비식별화란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민등록번호에서 생년만 남기고 나머지를 지우거나 주소의 일부를 삭제해 당사자를 식별할 수 없도록 처리한 정보(비식별화)에 대해서는 동의를 받지 않고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현재의 신용정보보호법 상에는 개인정보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사전 동의가 필요하지만, 익명화 작업을 거친 경우에는 동의 없이 활용이 가능하다. 익명화 외에 비식별화란 개념을 포함시켜 개인정보의 활용범위를 넓히고 좀 더 명확히 하겠다는 의도다. 예를 들어 신용카드사가 특정 지역에 사는 직장인들의 평균소득, 대출금, 결제정보 등의 정보까지 활용해 좀 더 정교한 마케팅이나 카드상품 출시를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 같은 내용을 신용정보보호법의 시행령 개정을 통해 추진하려 했다. 그러자 시민단체와 야권이 반발하고 나섰다. 법 개정을 하지 않은 채 국회 동의가 필요 없는 시행령만 바꾸려는 것은 ‘꼼수’라는 것이다. 김기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달 17일 정무위 업무보고에서 “신용정보법에서는 신용정보 중 식별 유무와 상관없이 개인의 신용을 판단할 때 필요한 정보는 개인신용정보로 보고 있다”며 “시행령 개정은 모법이 부여한 위임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융위는 결국 시행령 개정 방침을 접고 9월 이후 법 개정 시기를 모색해보겠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내년도 총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개인정보 활용을 확대하는 내용의 법 개정이 쉽지는 않을 전망이어서 빅데이터 활성화 방안이 기약 없이 지연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논란이 해외 국가들에서도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라는 점에 주목한다. 빅데이터라는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서 기존의 법 체계와 충돌하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다. 김영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의 빅데이터 산업이 가장 발달한 것은 2012년에 빅데이터 활용 지침을 명확히 한 영향이 크다”며 “우리나라 역시 2013년 미래창조과학부가 ‘빅데이터 산업 활성화 정책’을 내놓았지만 작년 초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터지면서 사실상 2년 가까이 논의가 중단됨에 따라 금융회사들도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법률사무소 광장의 고환경 변호사는 “사생활 침해에 대한 우려와 빅데이터 활성화를 위한 절충점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ankookilbo.com
김진주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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