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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탕스 상대는 독일군이 아닌 프랑스 극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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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탕스 상대는 독일군이 아닌 프랑스 극우였다

입력
2015.07.2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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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이 레지스탕스 주도… 지식층·민족주의와 조직 통합

독일군엔 큰 피해 입히지 못해 전후 실상과 거리먼 신화 만들어져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동부전선 배후서 전면 투쟁 나서

최대 저항군 소련 파르티잔… 정부 수집 보급선 끊고 부역자 사살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숲 속 야영지에서 무기를 손질하고 있다. 출처: Ross Burns (ed.), ‘The World War II: Album’ (London: Warfare, 1991)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숲 속 야영지에서 무기를 손질하고 있다. 출처: Ross Burns (ed.), ‘The World War II: Album’ (London: Warfare, 1991)

독일이 영국과 러시아의 일부를 뺀 유럽 전역을 제패하고 있을 때 정규군인이 아닌데도 반(反)파시즘 선전에서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식으로 싸우는 세력과 조직이 있었다. 저항을 뜻하는 프랑스어 낱말에서 비롯된 레지스탕스가 그들이다. 레지스탕스라면 불의에 맞서 의연히 떨쳐 일어난 자유의 전사라는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파시즘에 맞선 레지스탕스의 역사에는 참으로 미묘한 단면이 여러 겹으로 포개져 있고 여러 양상이 사뭇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우선 프랑스의 저항군부터 살펴보자. 유럽 최강이라고 자부하던 프랑스 육군이 1940년 5월에 어이없이 무너졌고 6월 14일에는 독일군이 파리의 개선문을 의기양양하게 지나가고 에펠탑 꼭대기에 갈고리 십자가 깃발이 내걸렸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페탱 원수는 독일에 협력해야 프랑스를 되살릴 수 있다며 프랑스 남부에 들어선 독일의 꼭두각시 비시 정부를 이끌었다. 프랑스 우파는 독일에 부역하는 페탱을 지지했다. 해외에서 저항을 부르짖으며 독일과 싸우자는 드골 장군의 외침은 프랑스 본토에서는 가냘프기만 했다. 프랑스 좌파는 움직이지 않았다. 독소불가침 조약으로 독일과 소련이 동맹국인 상황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우두머리 스탈린의 뜻을 어기고 독일에 맞서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점령군과 비시 정부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숨을 죽이고 있던 프랑스 공산당은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어기고 1941년 여름에 소련을 침공하자 저항에 나서기 시작했다. 원래 저항은 여러 갈래에서 벌어졌다. 공산주의자 외에도 프랑스 공화국 이념에 충실한 지식인들, 드골을 따르는 민족주의 세력 등이 각자 조직을 만들어 독일과 비시 정부에 맞섰다. 처음에는 어설픈데다가 체계가 없어서 효과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1943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2월에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이 대승을 거둬 독일군 불패 신화가 무참히 깨지면서 패배 의식이 많이 사라졌다. 더구나 비시 정부와 독일 점령군이 프랑스 청년 64만명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자 징용을 피해 저항에 가담하는 젊은이가 늘어났다. 난립해 있던 레지스탕스 조직들도 통일을 도모해서 늦봄에 이념과 노선을 뛰어넘어 통합 조직을 결성했다. 통합을 주도한 인물이 프랑스 고위 관리였던 장 물랭이었다. 거사에 성공한 물랭은 게슈타포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고 숨을 거뒀지만, 레지스탕스는 날로 거세졌다. 파시즘 반대 선전을 하고 정보를 수집해 연합국에 넘기고 독일 군인이나 부역자를 몰래 죽이는 일이 잦아졌고 무장 투쟁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위대한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처럼 안락한 삶을 버리고 투쟁에 나서 목숨을 내던진 영웅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에서는 실상과 거리가 먼 레지스탕스 신화가 만들어졌다. 레지스탕스를 주도하고 투쟁에 가장 앞장선 세력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공산당은 독일의 소련 침공 이전에는 저항에 미온적이었던 사실을 감추려 들었다. 또한 드골을 비롯한 전후 국가 주도 세력의 주장처럼 레지스탕스가 연합군의 승리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주장도 과장이다. 사실 레지스탕스는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연합군에게 패퇴하기 이전 독일은 베르코르 전투를 빼면 레지스탕스 소탕에 독일 정규군이 아니라 ‘밀리스’라는 프랑스 극우 민병대를 투입했다. 사실상 프랑스의 무장 레지스탕스의 주요 상대는 독일군이 아니라 프랑스 극우였다. 일종의 내전이었던 셈이다.

전투에 지친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대원들이 숲속에서 쉬고 있다. 출처: Fitzroy MacLean, ‘Josip Broz Tito: A Pictorial Biography’ (New York: McGraw-Hill Book Co., 1980)
전투에 지친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대원들이 숲속에서 쉬고 있다. 출처: Fitzroy MacLean, ‘Josip Broz Tito: A Pictorial Biography’ (New York: McGraw-Hill Book Co., 1980)

군사적 측면만 따질 때,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보다 더 눈에 띄는 저항 세력은 유럽 동부의 파르티잔이었다. 발칸 반도를 점령한 독일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해묵은 민족 대립을 부추겼고, 크로아티아의 파시즘 세력인 우스타샤는 독일에 빌붙어 세르비아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싸우는 레지스탕스 조직은 세르비아 사람인 드라쟈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체트닉이었다. 또한 크로아티아 사람인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도 독일 점령군과 싸웠다.

파시즘이 공동의 적이건만, 체트닉과 파르티잔은 저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다. 미하일로비치는 골수 왕정주의자였고 티토는 공산주의자여서 지향점이 달랐다. 독일 군인이 유고슬라비아에서 비정규 무장 저항조직에게 피해를 입으면 독일이 애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데 기겁한 미하일로비치는 전면 투쟁을 하기보다는 연합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소극적인 저항을 하자는 입장에 섰다. 티토는 독일군이 민간인을 많이 해칠수록 저항의 기반이 굳어진다면서 전면 투쟁에 나서 점령군을 괴롭혔다.

한편 체트닉은 때로 독일군과 타협하며 파르티잔과 싸우는 데 골몰하기도 했다. 발칸반도의 레지스탕스에도 이처럼 내전의 성격이 섞여있다. 처음에는 미하일로비치 편을 들고 공산주의자 티토를 꺼리던 영국의 처칠도 독일군과 싸우지 않는 미하일로비치에게 실망해 마침내 티토를 돕기 시작했다. 파르티잔이 저항의 주도권을 잡았고, 1943년 초에 네레트바 전투에서 잘 드러나듯 독일군의 대대적 토벌을 용케도 이겨내며 불리한 상황 속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이런 끈질긴 투쟁은 전후 소련에 굴복하지 않는 독자적 공산주의 국가인 유고슬라비아 탄생의 밑바탕이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군사적 의의는 조금은 더 신중하게 평가해야 한다. 동부전선 배후에서 독일군을 괴롭혀 연합군 승리에 이바지를 했음은 틀림없지만, 파르티잔 소탕 작전에 투입된 독일군 병력이 정예 전투부대가 아니라 대개는 자투리 부대였다는 사실도 감안해서 그 기여도를 평가해야 한다. 군사적 비중을 따지려면, 독일군과 소련군이 격돌하는 동부전선의 파르티잔 투쟁에 더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한다.

1941년 초여름 독일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소련은 모든 힘을 쥐어짜내 저항했고, 피점령 지역의 파르티잔 투쟁도 그 일부였다. 7월 초에 스탈린은 “적과 모든 부역자에게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어야 한다”며 점령된 지역의 파르티잔 투쟁을 촉구했다. 급조돼 활동에 나선 파르티잔 부대의 구성은 현지인, 피난민, 패잔병, 파견된 공산당원 등 매우 잡다했다. 1812년에 나폴레옹과 싸울 때 이미 게릴라 전술을 구사했던 러시아의 경험을 살려 소련 지도부는 파르티잔 투쟁을 독려했다.

소련 파르티잔 대원들이 독일군과 전투하고 있다. 출처: Ross Burns (ed.) ‘The World War II: Album’ (London: Warfare, 1991)
소련 파르티잔 대원들이 독일군과 전투하고 있다. 출처: Ross Burns (ed.) ‘The World War II: Album’ (London: Warfare, 1991)

소련 파르티잔은 정보를 모으고 적의 보급선을 끊고 부역자를 죽이고 독일군을 공격했다. 1941년 말에 9만명이던 파르티잔은 1943년에 55만명으로 늘었다. 규모만 따지면,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레지스탕스였고 성과도 적지 않았다. 많은 영웅이 탄생했고 미영 동맹국의 여론도 소련 파르티잔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속살까지 들여다보면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이 드러난다.

파르티잔 부대에는 침략자에 적개심을 불태우며 싸움에 나선 대원도 있었지만, 생존 자체가 목적인 이들도 적지 않았다. 체계적 보급을 기대하기 힘든 게릴라의 속성 탓에 현지 주민에게서 식량과 물자를 징발해야 했고, 독일군도 좋아하지 않지만 공산주의 체제에 딱히 우호적이지 않은 지역에서는 파르티잔을 싫어하는 주민도 많았다. 파르티잔이 활동하는 지역의 주민은 독일군의 무자비한 보복에 시달렸고, 파르티잔은 파르티잔대로 친독 부역자라는 의심을 받는 주민을 독일군 못지않게 혹독히 다루었다. 주민을 해치고 재산을 빼앗는 비적과 파르티잔의 경계선은 때로 아주 모호했다.

파르티잔 가운데에는 조직 유지 자체가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 독일군과 밀약을 맺고 싸우는 시늉만 하는 부대도 있었다. 독일과 소련 틈바구니 사이에서 아예 독자적인 정치 세력 행세를 하는 부대도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스테판 반데라라는 인물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독일, 러시아 양쪽과 싸웠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파르티잔은 소련의 4성 장군 니콜라이 바투틴을 매복 공격해서 죽게 만들 만큼 세력이 컸고, 전후에도 힘을 유지해 1950년대까지 활동했다. 스탈린은 파르티잔 투쟁을 격려하면서도 이런 까닭에 한편으로는 파르티잔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비엘스키 유격대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폴란드 유대인 학살로 가족을 잃고 살아남은 비엘스키 집안 삼형제는 벨라루스의 숲으로 도피했다. 학살을 피해 숲으로 들어오는 유대인의 수가 나날이 늘어나자 비엘스키 형제는 자위 차원에서 유대인 유격대를 만들었다.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힘을 불린 비엘스키 유격대는 독일군과 싸웠다. 막강한 전투 부대로 자라난 비엘스키 유격대는 900명에 가까운 아녀자와 노약자를 지켜냈고, 목숨을 잃은 이는 쉰 명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에 ‘디파이언스’라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 비엘스키 유격대는 파르티잔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 유럽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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