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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는 폭언ㆍ관리자는 사과 강요… 감정 노동자 '이중 상처'

입력
2015.07.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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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감정 노동자 약 800만명

'큰소리 치면 들어준다' 인식 만연

여성 노동자는 성희롱도 다반사

기업들은 '진상 고객'도 눈감아

28일 오후 서울 시내 한 대기업 통합 콜센터에서 감정노동자인 전화상담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28일 오후 서울 시내 한 대기업 통합 콜센터에서 감정노동자인 전화상담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요즘은 욕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지만 일주일 중 한 번 정도는 이유 없이 욕하는 고객을 겪어요. 일 시작하고 첫 일주일은 이 일을 계속 할지 고민했어요. 요즘 뉴스에서 감정노동자의 인권을 많이 다룬다는데 현장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겠어요.”(금융사 콜센터 직원 오모씨)

“고객센터를 찾아와 회원 주소 변경을 요청한 소비자가 업무 처리가 늦다는 이유로 센터 에 놓여 있던 증정용 프라이팬을 담당 직원에게 휘두른 일이 있어요. 감정노동자의 인권을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의 인격 무시는 종종 겪어요. ‘큰소리 내면 다 들어준다’는 인식이 소비자 사이에 널리 퍼져 있으니까요.”(대형마트 판매원 김 모씨)

소비자를 응대하는 것이 주요 업무인 고객센터 등에서 일하는 감정노동자들은 매일 블랙 컨슈머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실제 감정과 무관하게 친절을 강요 당하며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감정노동은 주로 콜센터 상담원, 대형마트와 백화점 판매 직원 등 서비스 분야 종사자들이 겪는다. 최근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지만 감정노동자들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가 없는 블랙 컨슈머 때문에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국내에서 일하는 감정노동자는 약 800만명으로 추산된다. 특히 여성의 경우 전체 취업자 약 1,000만명 중 감정노동이 중점 요구되는 서비스ㆍ판매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약 314만명에 이른다.

이들이 겪는 가장 흔한 피해는 언어 폭력이다. 즉, 소비자들이 툭하면 내뱉는 반말이나 욕설 때문에 겪는 상처가 크다. 대형마트 판매원 이 모씨는 “자식뻘 되는 손님한테 반말, 욕설까지 듣다 보면 이렇게까지 일해야 하나 싶어 눈물이 난다”며 “소비자와 마찰이 있을 때 무조건 사과를 강요하는 상사 때문에 한 번 더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금융권은 감정노동 연구가 비교적 활발한 편이지만 사정이 다르지 않다. 금융사 콜센터상담원 오 모씨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거나 화가 나면 바로 반말로 ‘야, 관리자 바꿔’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털어 놓았다.

특히 악의적으로 부당한 요구를 하는 블랙 컨슈머들은 감정노동자의 스트레스를 극대화시킨다. 백화점 판매원 박 모씨는 얼마 전 3분의 2 이상을 사용한 립스틱을 교환해 달라는 소비자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박씨는 립스틱에 이물질이 묻어 있다며 교환을 요구하는 소비자 이야기를 듣고 ‘제품에 이상이 있어도 3분의 2 이상 남아 있거나 구매 후 30일 이내 교환 가능하다’는 교환ㆍ환불 규정을 설명했지만 돌아온 것은 고함과 욕설이었다. 해당 블랙 컨슈머는 “이물질이 내 입에서 나왔다는 소리냐”며 매장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박 씨는 결국 개인비용을 들여 립스틱을 교환해 주고 나서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

금융권에서는 개인 부담으로 악성 고객의 불만을 처리하는 소위 ‘현금 박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은행 창구에서 근무하는 김 모씨는 “손님에게 현금을 내줬으나 나중에 갑자기 찾아와 돈을 덜 받았다고 언성을 높이며 막무가내로 항의해 개인비용으로 처리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특히 감정노동자 중에서도 여성은 성희롱이나 성차별적 발언 때문에 추가 고통을 겪는다. 대형마트 판매원 김 모씨는 “화장품 매장에서 크림을 발라 달라고 하거나 손 마사지를 해 달라며 은근슬쩍 신체 일부를 스치는 남성들이 있다”며 “이 제품을 사면 만나 줄거냐는 식의 성희롱적인 발언은 마트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은행 지점 창구에서 성차별적 시선을 느끼는 여직원들도 많다. 은행원 윤모씨는 “직급이나 이름 대신 ‘아가씨’로 호칭하며 ‘여직원보다 남자 직원과 업무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손님을 보면 이런 취급 당하려고 열심히 취업 준비 했나 싶어 허탈하다”고 설명했다.

최근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청년층의 감정노동 경험도 새롭게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지난해 청년 노동조합 ‘청년유니온’이 전국 15~29세 서비스업 종사자 22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절반이 넘는 121명(53.8%)이 ‘소비자의 무리한 요구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욕설 등 폭언을 들은 경험도 39.6%(89명)였다.

이 같은 감정노동 문제는 원인을 제공한 소비자와 사업주의 인식 개선이 동시에 이뤄져야 개선될 수 있다. 이성종 감정노동 전국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일부 소비자들의 비뚤어진 성향이 문제가 되는데다가 기업은 친절 서비스 경쟁의 명목으로 악성 고객의 문제행동을 눈감아 주고 있다”며 “당연히 정부와 기업, 소비자가 모두 해결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서울시는 지난해부터 잇따라 소비자단체, 기업과 감정노동자의 인권보호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는 등 감정노동의 인식 개선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소비자 개개인의 변화가 우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 제조업체 고객서비스센터장은 “학교 인성 교육 강화 등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하다”며 “배려심을 바탕으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성숙한 소비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김진주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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