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지나다니는 길목에 자라나는 잡풀들을 눈여겨 본 적이 있는가. 어디에나 있지만 막상 떠올리려고 하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너무 친밀해서일까, 아니면 너무 수수해서일까. 나는 그들을 미처 마음에 새겨 넣을 겨를이 없었다. 도시는 원래 이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 아니다. 땅은 온통 아스팔트로 덮여 있고 대기는 메마른 열기로 말라가는데도 이들은 용케 ‘틈새’를 찾아내 그곳에서 생을 도모한다. 언제든 무심한 사람들의 발길이나 자전거 바퀴가 이들의 몸을 사정없이 짓밟고 갈지도 모른다. 이토록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 속에서 잡풀들은 싹을 틔우고 생존을 위해 분투한다. 그 누구도 심거나 가꾼 적이 없는데 생겨나 어느덧 도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이 잡풀들은 있어도 없는 거나 다름없는 존재, 이미 ‘틈’ 그 자체이다.
그저 눈으로 보면 그만인 것을, 왜 우리는 카메라까지 빌려가며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카메라가 바로 이러한 ‘틈’을 보여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무심한 시선에는 시답잖은 몇 줄기 풀로 보였을 대상이, 사진 속에서는 근사한 주인공이 된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이는 “아, 이런 맹렬한 생의 의지라니!”라고 감탄하며, 또 다른 이는 “도시의 이면에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이 숨어있구나”하면서 놀라워한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풀이어도 이들은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사진 속에서만은 진기한 관상수(觀賞樹)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보도블록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간신히 올라온 망초(왼쪽 사진) 한 포기, 벽돌 틈 사이에 수줍은 듯 얼굴을 불쑥 내민 중대가리풀(오른쪽)은 전혀 화려하지 않지만 바로 그 ‘미미함’으로 인해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곳이 내가 평소에 지나다니던 그 길이며 저것은 길 한쪽 구석에 자라나 있던 풀포기였던가? 사진이야말로 평소에 숨겨져 있던 아름다움, 존재감, 생기를 발견하기에 적절한 도구가 아닐 수 없다. 아니 차라리 좀 더 욕심을 내어, 이를 또 하나의 ‘발명’이라고 얘기해보면 어떨까. ‘없음’에서 ‘있음’을 생성해내는 것처럼, 이 사진들은 잡풀을 새로운 리듬과 의미를 지닌 독자적인 개체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난 이래 지금 이 순간까지, 은닉해있던 미시적인 세계에 얽힌 이야기들이 사각의 틀 안에 담겨 하나씩 풀려나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익숙한 세계의 한 귀퉁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미미한 풀들의 모습을 포착함으로써 사진은 자신만의 비기(秘技)를 드러낸다. 이는 또한 ‘몫 없는 이들’로 버려져 있던 것들의 몫(part of no-part)을 세계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작업이기도 하다. 단단한 보도블록이나 벽돌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풀의 이미지는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시공간에 균열을 내는 과정을 강력하게 환기하고 있다. 어쩌면 사소한 이미지들을 두고 과장된 해석을 하는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금 말하거니와 바로 그러한 ‘사소함’, ‘무의미함’, ‘없는 것이나 거의 진배없는 있음’ 그 자체가 이 사진 이미지들이 지니는 파괴력의 요체가 되는 것이다.
섬광처럼 순식간에 우리의 눈을 쏘고 지나가는 낯선 친밀함이 우리를 저 깊은 기억의 창고에서 추억의 편린들을 끄집어내게 한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사진을 분석하는 글에서 ‘푼크툼(punctum)’이라고 불렀던 감각이 이러한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용어를 소개했는데, 스투디움은 문화적으로 약호화(略號化)된 명쾌한 이미지를 뜻하고, 푼크툼은 이러한 규정된 상태를 벗어나는 혼란스러운 이미지를 가리킨다. 사진의 본질은 ‘사건’처럼 엄습해 감상자를 날카롭게 찌르는 푼크툼에 있다. 이런 이미지들은 일상에 휩쓸려 관성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일 듯 말듯 한 상처를 내고 스쳐지나간다.
이 사진은 도심 속 배수구 안에서 뿌리를 내린 씀바귀이다. 창살 안에 숨어있어 사람의 발길을 피해 용케도 잎사귀들을 뻗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곳의 생존조건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아무래도 음습한 장소인 만큼 내리쬐는 햇빛의 양이 시원치 않아 보인다. 또한 비가 오면 하수도를 향해 몰려드는 물살에 떠내려가기 일쑤다. 전면을 가리고 있는 격자 패턴의 쇠창살이 이 풀포기가 껴안아야할 모진 운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진은 차디찬 창살을 잡풀의 이미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액자-틀’로 바꾸어 버린다.
역설적이게도 씀바귀 잎사귀의 초록색은 이 철골 구조물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짧은 시간 동안 허락된 생의 비의(秘意)를 환하게 발산시킨다. 삶과 죽음이 서로를 마멸시키면서 짧은 생애를 걸고 한판 내기를 벌이는 장면은 도시의 일상 곳곳에서 소리 없이 벌어지고 있다. 삶을 억압하는 듯한 쇠창살이 영원히 닳아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내구성을 자랑하면서 버티고 서있다면, 잡풀은 죽고 태어나고 사멸하고 움트는 ‘반복’을 통해 맞설 것이다. 결국엔 초록이 이긴다!
긴 입자루를 따라 3개의 소엽이 옆으로 퍼져 있는 이 잡풀의 이름은 괭이밥이다. 고양이가 뜯어 먹는 풀이라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빛이 쏟아지면 소엽들은 펴지고, 어둠이 깔리면 오므라드는데 그 모양새가 영락없는 ‘하트’다. 그래서인지 꽃말이 ‘빛나는 마음’이라지. 이렇게 흔하디흔한 풀에 아기자기한 이름과 꽃말을 지어준 사람은 누구일까?
화려하고 잘난 것들에 밀려나 변변한 존재감조차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들에게 제 몫을 찾아주려고 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있을 터이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시선에 담아두지 못했던 것들, 그래서 평소에는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처럼 여겨졌던 장소에서 몫 없는 자들의 몫을 발명해내는 이들의 마음을 엿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사진들을 보면 된다. 길가의 잡풀을 꼼꼼하게 눈여겨보고, 생명이 발산되는 아찔한 장면들을 카메라로 포착한 사람들의 눈망울도 틀림없이 그런 마음을 닮았으리라. 꽉 막혀 있던 일상 속에서 ‘틈’을 보고, 틈을 통해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몫 없는 이들의 ‘몫’을 담아내는 일. 그것이 사진이 이루어낼 수 있는 작은 혁명이다. 이러한 작은 균열이 모여 우리가 사는 팍팍하고 꽉 막힌 도시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믿는 대로 볼 것이니까.
이직 기자 jk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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