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는 검은 비 쏟아져… "뜨거워, 살려줘" 행인 비명 생생
종전 후 한국으로 돌아간 피해자 여전히 보상·치료 못받은 채 고통
日, 전쟁의 무서움 잊은 듯, 핵무기는 물론 원전도 막아야
“그 해 가장 더운 날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전차에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빛과 불덩이같은 것이 전차를 순식간에 덮쳤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눈 앞에서 시가지가 다 사라졌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피투성이였습니다.”
박남주(83)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고문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70년 전 오늘(6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피해자로서 10년 넘게 일본 내외에서 활발하게 증언활동을 해온 박 고문을 민단히로시마지방본부 사무실에서 만났다. 전쟁 말기 히로시마에는 약 10만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는데 2만 여명이 원폭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알려져 있다.
박 고문은 경남 진주 출신 부모님이 일을 찾아 건너온 히로시마(廣島)에서 낳은 첫 딸이었다. 그는 부모님과 동생 넷과 같이 원폭 투하 지점에서 1.8㎞ 가량 떨어진 후쿠시마초(福島町?공교롭게도 2011년 원전 사고가 난 후쿠시마와 한자가 같다)라는 곳에 살았다. 당시 히로시마는 해군사관학교와 전시사령부 등이 위치하고 있어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했다. 상공에는 미군 전략기인 B-29가 자주 출몰했고, 수시로 공습 경보가 울렸지만 그래도 폭격은 없었다.
“그날도 경보가 있었지만 오전 7시에 해제됐어요. 평소처럼 아침식사를 마치고 동생 둘을 데리고 전차를 탔습니다.” 그 길로 그는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고도 했다. 당시 병가 중이어서 혼자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박 고문은 운이 좋았다. 5남매와 부모님 모두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뿐 무사했다. “원폭 이후 30분쯤 지나니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렸어요. 기름을 붓는 것 같았죠. 거리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쓰이 아쓰이 다스케테쿠레’(뜨거워 뜨거워 살려줘)라며 몇 발짝 걷다가 픽픽 쓰러지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한참 동안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다. 가스탱크가 터졌다고 수군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이렇게 그날을 어제 일처럼 상세히 묘사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는 “강변에 모여 함께 시신들을 태운 것”을 꼽았다. “애건 어른이건 할 것 없이 움직일 수 있으면 모두 동원됐어요. 집을 잃은 사람들은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는 데서 정부의 배급에 의존하며 함께 생활했습니다. 어떻게 살아나왔는지, 스스로가 대견할 뿐입니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는 ‘히바쿠샤’(피폭자)에 대한 냉대가 명백히 존재했다. 더구나 조선인으로서 그는 몇 배의 차별을 견뎌내야 했을 터다. 그는 “우리는 현실을 비관하기보다 살 방도를 찾았다. 교육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에 후손들 교육도 열심히 시켰다”며 말을 아꼈다.
재일 한국인들이 일본인과 동일하게 의료비 혜택 등을 지원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 일본 대법원이 외국인 피해자에 대한 권리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뒤부터다. 그는 그러나 “종전 뒤 한국으로 돌아간 피해자들은 이 같은 보상을 받기가 쉽지 않다”며 “생전에 부모님이 증인이 필요한 원폭피해 동포들을 도우셨고 나도 2002년부터 한국에 있는 피해자들이 보상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
박 고문은 학교와 시민단체 등을 다니며 증언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역사를 모르는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그는 “세계 어디서도 이런 일을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 무기로서의 핵은 물론이고, 후대에까지 피해를 줄 수 있는 원전 사용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일본 정부는 70년 동안 전쟁없이 살아서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잊은 것 같습니다. 역사를 바로 보고, 과오를 답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그래야 합니다.”
히로시마= 김혜경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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