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박물관 소장 사료 훼손 심각
경희대 측 예산 부족 이유로 방치
국내 최초이자 세계 최대 규모 고(古)지도 전문 박물관으로 알려진 경희대 혜정박물관의 독도 관련 고지도와 고문헌 등이 학교측의 관리 소홀로 심하게 훼손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예산 부족을 이유로 주요 사료를 방치하는 대학의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지적이다.
7일 오전 경기 용인시 기흥구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본관 4층에 2,300여㎡ 규모로 마련된 혜정박물관에 들어서자 후텁지근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1,400여㎡ 전시실 안에는 그나마 냉방기가 가동되고 있었지만, 사무실과 딸린 수장고 2곳 가운데 1곳은 마치 찜통과도 다름없었다.
구멍이 뚫렸거나 누런 곰팡이가 서린 석고보드 천장에선 물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보존처리가 이뤄지지 않은 고문헌 액자화 등 수십 만점이 어지럽게 방치돼 있었고 일부는 습기를 머금고 색이 바래거나 찢겨 너덜너덜했다.
독도는 물론 대마도까지 우리 영토로 표기된 1800년대 중반 고지도 ‘해좌전도’ 등은 곳곳에 구멍이 나 있기도 했다. 선반 사이사이 4,000~5,000원짜리 제습제가 놓여있었지만 사료들을 지켜내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 박물관 관계자는 “종이를 보관하려면 습도 조절이 가장 중요한 데 관리비 지원이 안 돼 마지못해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혜정박물관 설립은 2002년 2월 재일교포 3세인 김혜정(69ㆍ여) 관장이 유물 26만여 점을 경희대에 기증ㆍ기탁하면서 이뤄졌다.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경희대 설립자 미원(美源) 조영식 박사의 끈질긴 구애에 김 관장이 30여년 간 사비를 털어 수집한 고지도 등을 무상으로 내놨다. 세계유일본인 남미 아즈텍문명시대의 가죽지도(11세기)와 독도가 우리 땅으로 그려진 신경준의‘함경도ㆍ경기도ㆍ강원도 지도’(보물 제1598호), 간도를 조선 땅으로 표기한 프랑스 ‘카타이지도’(1760년) 등 상당수는 역사적 보존 가치가 높은 사료다.
하지만 2012년 조영식 박사가 향년 91세를 일기로 타계한 뒤 사정은 서서히 달라졌다. 학교측은 독립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기는커녕 현 건물의 유지비마저 깎기 시작했다. 지원이 열악해 방대한 유물을 관리하는 전문 학예연구사는 2명에 불과하고 그나마 이 가운데 1명의 급여는 김 관장이 사비를 털어 지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희대는 재정난으로 인해 학내 모든 기구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이 줄어든 탓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이승한 경희대 국제캠퍼스 부총장은 “(기증 유물을) 의무적으로 관리해야 하지만, 일부 잘못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대학이 힘들다 보니 예산을 축소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관장은 “한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고지도 등이 썩어가는 상황을 보면 내 가슴과 영혼이 썩고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이 밀려온다”며 가슴을 쳤다.
글ㆍ사진 유명식기자 gija@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