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독립운동가 자료 부족, 역할에 비해 정당한 평가 못 받아
독립유공자 등록여성 250명 정도, 전시 '돌아온 이름들'서 새롭게 조명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로 등록된 남성이 약 1만4,000명인데 여성은 250명 정도입니다. 그 남성들 뒷바라지는 누가 했겠어요. 단순한 가사 노동을 한 게 아니라 목숨을 걸고 싸운 겁니다. 여성의 독립운동이 역사 속에 묻혀선 안 됩니다. 우리 사업회가 해야 할 일이죠.”
김희선(71)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은 지난 5일 서울 용두동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독립운동가의 역할이 제대로 인정 받지 못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70년간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 유관순 열사만 거론해온 역사가 이를 방증한다는 것이다. 사업회가 지난 1일부터 23일까지 서울시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돌아온 이름들’이라는 전시를 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 266명의 이름이 이 전시에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전시에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최근 영화 ‘암살’에 소개돼 관심을 모은 약산 김원봉의 부인으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을 맡았던 박차정 여사, 김구 선생의 비서였던 이화림 여사 등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아 이름도 없이 성씨로만 불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여성들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고 지위도 없었습니다. 여성의 역할이라는 게 군자금을 모아서 갖다 준다든지 전단지를 몰래 뿌린다든지 하는 정도였죠. 그래서 기록이나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독립기념관에 관련 자료가 쌓여 있다지만 국가 소유라서 손을 댈 수 없다는 말만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 전시도 사업회가 모은 자료로만 한 겁니다.”
김 회장은 가상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주인공으로 한 ‘암살’을 보면서 “최동훈 감독이 남자현 열사를 생각하고 만든 게 아닌가 싶었다”고 말했다. 남 열사는 1925년 사이코 마코토 조선 총독 암살 미수사건을 주도했다.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이화림 여사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했고 훗날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부대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암살’의 안옥윤(전지현)이 허구의 인물이라지만 실제로 윤희순 의사처럼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분도 있었다”며 “이런 분들이 모두 묻혀 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16, 17대 국회의원 시절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에 앞장서며 역사 재정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 역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선 잘 몰랐다고 했다. 계기가 된 건 2년 전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건네 준 여성 독립운동가 관련 서적 몇 권이었다. 그는 “그 책을 읽고 나서 ‘이렇게 엄청난 역사가 묻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며 “바른 역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사업회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 집안(작은 할아버지가 김학규 장군)에서 자란 김 회장은 어릴 적부터 가족과 친척에게서 여성들이 어떻게 독립운동에 참여했는지 들어왔다고 했다. 국회의원 시절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 회장을 지내며 친일파 후손들을 비판했지만 그 때문에 보수 언론에게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아니다’ ‘친부가 친일파다’ 등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법원이 김 회장의 손을 들어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한동안 속앓이를 했다.
김 회장은 “‘암살’을 보고 난 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여성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10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고교생들과 함께 3ㆍ1만세운동을 현대식으로 재현한 플래시몹을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밖에도 여성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한 강연, 서적 출간, 다큐멘터리 제작, 위령탑ㆍ기념관 건립 등도 계획하고 있다.
“하드웨어도 중요하지만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합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야 대중이 관심을 가질 테니까요. 걸림돌은 이념 논쟁입니다.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인정받지 못한 분들이 많아요. 역사는 색깔 논쟁을 극복해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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