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곳이든 지명을 살펴보면 그 지역의 유래를 대강 알 수 있다. 가령 서울 서대문구 영천동(靈泉洞)은 인근 금화산 중턱의 신비한 약수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위장병을 앓는 사람이 물을 마시고 효험을 보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바로 아래 옥천동(玉川洞)은 구슬 같이 맑은 물이 흘렀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고 그 아래 냉천동(冷泉洞)에는 이름처럼 차디찬 우물이 있었다. 지금도 그 시절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이웃해 있는 영천ㆍ옥천ㆍ냉천동 일대는 목을 축이고 땀을 씻으며 더운 여름을 보낼 명소가 됐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이 일대에서 그 온전한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개천 흐르던 곳에 들어선 재래시장
이제는 나이든 어른들의 기억으로만 알 수 있지만 영천시장이 들어선 곳에는 원래 인근 안산과 인왕산의 시원한 개울이 흘렀다. 두 산에서 발원한 물은 영천시장을 지난 다음 의주로를 따라 서대문로터리 쪽으로 흘러갔는데 지금은 개천이 모두 복개돼 물길의 흐름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영천시장의 역사에 대해 일제시대부터 있던 시장이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가 다시 문을 열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하지만 영천시장 관계자의 설명은 다르다. 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무악재를 넘어 와 이곳에서 떡을 사먹으며 허기를 채우고 마음을 진정시켰는데 그들 떡집을 중심으로 나중에 시장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영천시장을 틈틈이 찾아간 것은 이곳이 서울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재래시장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먹을 것도 많아 장 보고 주전부리 하기에 제격이다.
시장은 남북 방향으로 뻗어있는데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로 줄지어 있는 가게에선 떡, 생선, 고기, 과일, 채소, 반찬, 건어물, 빵, 옷, 잡화 등을 판다. 좌판에 올라 있는 떡볶이, 김밥, 어묵, 튀김, 전 같은 것을 보면 장을 먼저 보아야 할지, 배를 먼저 채워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그런 갈등 때문인지 사람들은 대개 통로를 따라 걸어가며 가게와 물건을 눈 여겨 보았다가 다시 돌아나오면서 장을 보고 음식을 사먹는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의 중년 손님이 많다. 인왕산이나 안산을 올랐다가 내려온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막걸리나 소주 한잔 걸치며 산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달콤한 꽈배기의 유혹
영천시장은 과거에 떡으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도 떡집이 많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영천시장의 대표 먹거리는 꽈배기가 됐다. 시장 안 그리고 입구에 네댓 군데의 꽈배기 집이 있다. 달인이니 원조니 TV에 소개됐느니 하는 광고 글이 아니더라도 이곳 꽈배기는 유난히 쫄깃하고 달달하다. 가격도 저렴해 1,000원이면 보통 크기는 4개, 큰 것은 2개를 준다. 그 중 한 가게 주인의 꽈배기 만드는 솜씨는 신기에 가깝다. 밀가루 반죽을 짧게 잘라 하나씩 늘어놓은 뒤 번개같이 휘감아 꼰 다음 식용유에 튀겨 순식간에 만들어 낸다.
한잔 술에 기분이 좋아진 중년의 아저씨들이 달콤한 꽈배기를 후식 삼아 먹으며 시장 안을 걷고 있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설탕 묻은 꽈배기를 입에 넣는 게 약간 부끄러운지 그들의 얼굴이 조금 머쓱해 보인다. 재래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소박한 표정이다.
●박원순 시장이 자주 찾던 헌책방
영천시장에는 다른 시장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골목책방이라는 이름의 중고서점이다. 그 역사가 50년 가까이 됐으니 영천시장의 그것과 비슷하다. 서점 주인 황정기(74)씨는 대학 시절 헌책을 사고 팔아 학비를 마련했던 둘째 형의 영향을 받아 서점을 차렸다. 서점은 시장 입구에 있었으나 최근 규모를 줄여 조금 안쪽으로 옮겼다. 황씨는 “내 나이가 일흔이 넘은데다 손님도 줄어 서점 규모를 축소했다”고 했다.
이 조촐한 책방을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주 찾았다. 박 시장이 참여연대에서 일할 당시 서점에 들러 정부 간행물을 많이 구해갔다고 한다. 그때 박 시장은 서점에 간판조차 없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지인에게 부탁해 골목책방이라는 나무 간판을 만들어 주었다.
황씨는 요즘 손님이 많이 줄었다고 했지만 시장 안에 헌책방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골목책방은 영천시장의 또 다른 명소다.
●박완서 작가가 살던 곳, 사람의 체취 지우는 재개발
시장 구경에 이어 가볼 만한 곳은 독립문-서대문 독립공원과, 의주로 건너편의 교남동 일대다. 독립문과 독립공원은 뒤로 미루고 이번에는 교남동으로 건너가보자.
교남동(橋南洞)은 이름처럼 다리 남쪽의 동네다. 다리 북쪽 그러니까 교북동도 있다. 개울에 석교가 있었는데 바로 그 다리가 교남동과 교북동의 경계였다. 지금은 돌다리가 없어지고 동네 이름만 남아 있다. 영천시장 안에는 석교식당이라는 순댓국 집도 있다.
교남동은 한국전쟁 이후 도시 서민의 주거 문화를 담고 있는 지역이었다. 한옥과 서민적인 단독주택 그리고 연립주택이 함께 있었다. 좁은 골목과 계단을 두고 사람들이 부대끼고 어울리며 훈훈한 정을 나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온통 공사판이다. 뉴타운으로 지정돼 원래 있던 집과 건물 대부분이 철거됐다. 그 자리에서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앞으로 한층 세련된 주거단지가 들어서겠지만, 이제껏 이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체취를 완전히 지운, 획일적인 동네가 될 게 분명하다. 공사장의 소음이 울리는 가운데 주거생존권과 영업생존권의 보장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걸리고 간이 농성천막이 설치됐지만 힘이 모자라 보인다.
교남동 뒤 월암공원에 올라 건너편을 바라본다. 아파트 단지가 영천시장을 에워싼 채 솟아있다. 영천시장을 가운데 두고 왼쪽으로 경기대, 오른쪽으로 현저동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1980년대까지만 해도 허름한 집들이 많았다.
이곳 판자촌의 모습을 박완서는 소설 ‘엄마의 말뚝’ 등에서 표현한 적이 있다. 개성에서 태어난 박완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를 따라 현저동으로 이사했다. 현저동 산꼭대기, 거기에서도 남의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박완서는 주민들이 틈만 나면 술 마시고 싸움질 하는 것이 처음에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시절 궁핍했던 이들에게 그런 거친 생활은 조금도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스무 살 전후의 박완서는 한국전쟁 당시 오빠가 좌익운동을 한 경력 때문에 고초를 당하다 목숨을 잃고, 아버지나 다름 없던 삼촌 역시 옥사하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노모와 어린 조카, 젖먹이가 딸린 올케 등이 함께 살면서 아사 직전까지 갔던 그 지긋지긋한 세월을 바로 현저동에서 보냈다. 살아남기 위해 수모를 참고 비굴해져야 했던 박완서는 그때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쓰겠다고 결심했다. 박완서는 나중에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냈을 때, 또 현저동이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이 살던 마을을 찾아갔다. 지긋지긋했던 공간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소식에 박완서는 도리어 아련한 아픔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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