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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한 내용 쏙 뺀 日…한일회담 문서 '반쪽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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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한 내용 쏙 뺀 日…한일회담 문서 '반쪽 공개'

입력
2015.08.1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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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개인청구권 日 실사 결과

구체적 자료 갖고도 대부분 은폐

北과 교섭 때도 청구권 봉인 의도

식민지 조선에 남긴 일본인 재산

日 정부가 포기 요구 명분 없어

정치 문제화 우려 거의 공개 안해

독도 관련 문서 가려진 부분은

현재 일본 입장과 다른 내용인 듯

한반도 반출 문화재 목록도 덮어

일본 정부는 한일 회담 관련 외교문서를 민감한 내용을 가린 채 공개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본 정부는 한일 회담 관련 외교문서를 민감한 내용을 가린 채 공개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반면 한국 정부는 내용적으로 다소 부실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공개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반면 한국 정부는 내용적으로 다소 부실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공개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본 정부가 공개한 한일회담(1951~65년) 관련 외교문서를 둘러보면 곳곳에 시커멓게 먹칠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내용적으로는 다소 부실하더라도 관련 자료를 모두 공개한 한국 정부의 태도와는 크게 대비된다. 수교 50주년을 맞은 오늘날도 일본 정부는 올바른 역사인식의 전제가 되는 역사적 사실의 민감한 부분을 먹칠로써 감추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외교문서 공개를 위한 법정소송을 전개해온 시민단체 ‘일한회담 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2006년 8월 이후 비밀 해제한 약 6만매의 문서 가운데 20% 이상을 비공개하거나 혹은 일부 삭제(먹칠) 후 공개했다. 일본이 먹칠을 한 채 내놓은 외교사료에는 인명(人名) 등 이른바 개인정보도 있지만, 그 대부분은 한일관계 및 북일관계, 일본 국내정치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거나, 결과적으로 일본 정부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이다.

먹칠이 된 일본 공문서 가운데 우선 눈에 띄는 대목은 한국의 대일 청구권에 대한 일본 정부의 실사(實査) 내용이다. 1961년 11월11일 박정희 전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서 청구권이라는 명목은 아무래도 좋으니 “법률상 근거가 있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말한 이후 일본측은 실제로 한국측이 주장한 징용피해 3억6,000만달러 등 총액 12억달러 상당의 보상요구에 대해 면밀히 조사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말한 ‘법률상 근거’란 과거 일본제국의 법체계로 이해됐고, 이를 근거로 도출된 일본측의 실사 결과는 당연히 한국측 기대치와는 한창 거리가 멀었다. 1961년 1월 일본 대장성과 외무성이 내놓은 한국의 대일 청구권 평가액은 각각 1,600만달러와 7,077만달러에 불과했다.

여기서 오늘날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청구권에 대한 일본측의 실사 내용이 거의 먹칠이 되었거나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령 당시 한국이 개인피해자 103만2,684명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 데 대해 일본 외무성은 징용노무자 36만5,000명, 군인ㆍ군속 19만2,000명, 군속 사망자 1만5,500명 등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하면서 약 101억엔의 보상금을 예상했다. 산정 금액의 많고 적음은 미뤄두더라도, 이 같은 시산 결과를 내놓은 것은 일본 정부가 한국인 개인청구권에 대해 구체적인 근거자료를 갖고 검토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하지만 이런 개인청구권 관련 공문서의 대부분은 아예 공개되지 않았거나 먹칠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 정부가 핵심 자료를 움켜쥐고 있고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사실상 방관하는 가운데 한국인 개인피해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적반하장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지금도 일본 유초(郵貯)은행에는 한국인 징용피해자의 우편저금통장 수만 책이 보관되어 있다지만 그 실체는 물론 반환 여부도 여전히 베일 속에 있다.

일본 정부가 먹칠한 공문서는 한국의 대일 청구권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일본측은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가운데 특히 북한과의 청구권 교섭에 영향을 줄 여지가 있는 내용 또한 삭제한 후 내놨다. 1965년의 한일 청구권협정은 어디까지나 한국 정부의 시정권이 미치는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 한정됐고, 일본의 표현을 빌리면 북한 지역은 완전히 ‘백지’ 상태로 남았다. 가령 일본 외무성은 우편저금 등 개인청구권을 산정할 때 남북한 인구비례 등을 고려해 한국 몫을 인정했다. 일본 정부는 북일회담 또한 한일회담과 같이 경제의 논리로써 청구권 문제를 봉인하길 원하는 듯하다. 실제 북일 청구권협상의 기초가 되는 2002년 9월17일 평양선언에서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상호 재산 및 청구권을 포기하는 기본원칙에 합의한 후 이를 사실상 대체하는 일본의 대북 경제지원을 명시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정부는 한일 청구권협상 때 검토된 내용이 향후 북일회담에서 북한이 교섭자료로서 활용할 가능성을 우려해 감추고자 한 것이다.

청구권 문제에 관한 한 일본 정부는 자국 국민들에게도 그다지 당당하지 못한 듯하다. 일본인 개인이 식민지 조선에 남긴 재산에 관한 공문서의 대부분도 비공개 상태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한국 내에 갖고 있던 토지, 가옥, 예금 등 개인재산은 이른바 ‘적산(敵?)’으로 간주돼 미군정령 33호에 의해 몰수된 후 1948년 한미협정에 의해 한국 정부에 그 소유권이 이관됐고, 이는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을 통해 거듭 확인됐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오랫동안 재한 일본인 재산에 대한 청구권(이른바 역(逆)청구권)을 주장했고, 실제 한일회담에서 이를 근거로 한국의 대일 청구권을 상쇄하려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일본이 한국 재산의 80%를 내놓으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한일회담이 4년여 중단된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일본 정부가 1958년 공식적으로 한국에 대한 역청구권을 포기함으로써 한일회담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식민 지배를 합법적 행위로 간주해온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에 재산을 남겨두고 빈손으로 돌아온 일본국민에게 관련 재산권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명분은 없었다. 일본 정부가 주창해온 논리를 적용하더라도 재한 일본인 재산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보장한 일본제국의 헌법 하에서 ‘합법적으로’ 구축된 사유재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 정부는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에 대해 역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공언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외교보호권만을 포기한 행위였지 국내적으로는 일본인 개인의 한국에 대한 청구권은 유효하다고 말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1957년 이후 귀환자에게 ‘급부금(給付金)’을 지급하고 최고재판소가 1968년 이를 ‘전쟁 희생’이라고 판결함으로써 일단 수습된 듯하지만, 그렇다고 일본 국내정치적으로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요컨대 일본 정부가 한국의 대일 청구권을 무력화하기 위해 들이댔던 역청구권의 실상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행여나 일본 국내에서 이것이 다시 정치 문제화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먹칠이 단연 돋보이는 또 다른 일본 외교문서는 역시 독도와 관련된 부분이다. 독도가 뜬금없이 한일회담의 의제가 된 것은 1962년 한국의 군부정권이 청구권 자금 확보에 목을 매면서 회담의 주도권을 사실상 일본측에 넘겨주면서부터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어떻게든 한국의 군사정권을 몰아붙여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ICJ) 상정 등을 명시한 외교기록을 남겨두려 했다.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두 차례에 걸쳐 아예 독도를 폭파해버리자고 말하고, 나중에는 이 문제를 제3국 조정에 맡기자고 역제안하는 논란거리를 제공한 것도 이 같은 일본측의 공세에 대한 나름의 자구책으로 풀이된다.

독도 문제와 관련해 먹칠이 된 일본 외교문서의 상당 부분은 당시 일본이 한국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취한 조치 혹은 언급이 현재 일본 정부의 ‘다케시마’에 대한 입장과는 상이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이다. 현재 일본 정부는 독도를 타협의 여지가 없는 자국 영토라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당시에는 ‘분쟁지역’으로 간주되는 수준에서 타협할 수도 있는 듯한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간 한일 양국은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고,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을 통해 해결하기로 한다”는 알 듯 모를 듯한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에 합의함으로써 독도 문제의 현상유지를 도모했다. 이로써 독도의 법적, 실질적 지위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일반론이다.

문화재에 관해서도 일본 정부는 숨기고 싶은 것이 많은 듯하다. 궁내청 서릉부(書陵部) 및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한국문화재의 일람표, 데라우치(寺內) 문고 관련 기록 등 일제가 한반도에서 반출한 문화재의 목록 및 유출 경위, 취득 가격 등에 관한 문서 또한 먹칠이 되어 있다. 일본 측이 이들 외교문서를 공개하지 않은 것은 물론 공개될 경우 ‘약탈’ 논란이 일어 한국 혹은 북한으로부터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에 대한 실태조사 및 반환 요구가 제기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문화재의 경우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부속협정 중 하나로 체결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을 통해 한국측 반환요구 품목의 32% 정도인 1,431점이 반환됐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눈길이 가는 대목은 일본 정부가 천황과 관련된 것은 이미 알려진 것도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먹칠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이동원 전 외무부장관과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대화록(1965년 3월26일)은 당사자인 이동원이 1997년 일본에서 발간한 저서에서 자세히 적어 놨다. 책에 따르면 둘은 일본어로 과거 서울 남산에 난립했던 판잣집(일명 하코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판잣집이 도시빈민의 급조된 허름한 오두막집이라는 설명을 듣자 히로히토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에 이동원은 “폐하, 판잣집은 낮에는 보기 안쓰럽지만 달밤에는 로맨틱합니다 … 판잣집의 벽은 이웃과 바짝 붙어있어 옆집에서 음란하게 소곤대는 소리까지 잘 들립니다”라고 말해 히로히토를 기쁘게 했다고 한다. 한편, 천황을 ‘배알’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던 이동원은 앞서 한국에서 발간된 같은 책에서는 이런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알립니다

이 시리즈의 제25회 ‘한일 해양레짐 50년’(2015년 8월4일자)은 조윤수씨의 논문 ‘한일어업협정과 해양경계 획정 50년’을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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