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제 둘러싼 첫단추부터 엇갈려
강대강 모드로 운신폭 좁아지기도
北 남측 최후통첩 고심하다 결단
세부 쟁점 협의선 신경전 이어질듯
25일까지 나흘째 이어진 판문점 남북 고위급 접촉은 유례 없는 마라톤 협상이었다. 북한의 지뢰, 포격 도발에 대한 남측의 사과 요구에 북측이 도발 자체를 부인하며 맞섰기 때문에 초반부터 협상은 진전이 어려웠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협상 도중 북한과 협상팀을 향해 “사과와 재발 방지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고 공개 지침을 내리면서 고비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가 실제 협상 과정에선 북한의 지뢰 도발 직접 사과 대신 부상을 입은 장병에 대한 ‘유감 표명’ 선에서 타협점을 제시하면서 전기가 마련됐다.
‘도발 사과’ 대 ‘확성기 방송 중단’
23일 오후 3시30분 시작된 이틀째 접촉은 현장에서 전체회의 및 수석대표 접촉, 휴식 및 본부 훈령 대기를 번갈아 갖는 방식으로 25일 0시55분까지 33시간 이상 이어졌다.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이 서울과 평양의 박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훈령을 받아가며 협의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24일 오후까지도 접촉 성과는 진전이 없었다. 정부 관계자는 “우리는 북한의 지뢰, 포격 도발 사과를 집중적으로 거론했고 북한은 우리의 확성기 방송 심리전 중단을 계속 요구했다”며 “다른 남북 현안도 초기에는 양쪽 입장을 쭉 얘기했는데 그 이후에는 별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협상이 제자리 걸음을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의제를 둘러싼 남북의 논의가 첫 단추부터 엇갈렸기 때문이다. 정부는 애초 4일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폭발 사건과 20일 서부전선 포격 도발 항의에 초점을 맞췄다. 22일 남북 고위급 접촉 사실을 발표할 때도 김규현 국가안보실 1차장은 “남과 북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남북관계 상황과 관련해 접촉을 갖기로 했다”고만 밝혔다. 최근 북한의 도발이 주요 대화 의제라는 의미였다.
그러다 22일 오후부터 10시간여의 첫 접촉을 가진 뒤 설명이 조금 바뀌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23일 새벽 발표한 남북 접촉 결과는 “최근 조성된 사태 해결 방안과 앞으로 남북관계 발전 방안을 폭넓게 협의했다”는 것이었다. 지뢰, 포격 도발과 확성기 방송은 물론 그 동안 남북관계 진전을 가로막아왔던 5ㆍ24 조치 해제, 금강산관광 재개 등 여러 현안이 북측 요구로 함께 논의됐다는 뜻이었다. 정부로선 핵심 현안인 이산가족 상봉 및 DMZ 평화공원 조성과 남북 경원선 연결 등 관심 사항도 함께 꺼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어진 협상에선 ‘지뢰, 포격 도발 사과’라는 근본 현안이 풀리지 않으면서 다른 현안 논의도 정체됐다.
사과 대신 유감표명 타협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선 최근 북한의 도발 상황을 어떻게든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정부의 원칙론이 확고하다는 점도 합의를 지연시킨 변수였다. 무엇보다 최고 결정권자인 박 대통령이 원칙론에 입각한 강경한 입장이었다. 박 대통령은 남북 접촉이 한창인 24일 오전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공개 발언에서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위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과거와 같이 북한이 도발 상황을 극대화하고 안보의 위협을 가해도 결코 물러설 일이 아니다”라고 협상 상대인 북한을 공박하기도 했다. ‘도발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도 핵심 요구 사항으로 다시 강조했다.
관건은 북한이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점이었다. 북한은 20일 노동당 중앙군사위 비상확대회의를 소집하며 인민군 총사령부 명의로 지뢰는 물론 포격 도발에 대해 “남측이 있지도 않은 구실로 망동을 부린다”며 강하게 부인한 바 있다. 사실상 김정은의 입장이었다.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이런 초기 주장을 뒤집고 도발 사실을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사과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특히 남북 지도자가 물러설 수 없는 선을 못박으면서 협상은 진전이 어려웠다.
그러나 남측이 이날 오후 ▦지뢰 도발 사건 피해 장병에 대한 북측의 유감 표명 ▦북측의 사과에 따라 확성기 심리전을 일단 중단하지만 약속 위반이 있을 경우 언제든지 방송을 재개한다는 내용 등의 합의문 초안을 제기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북측 대표단은 남측의 문안을 받은 직후인 24일 오후 1시 판문점 회담장인 남측 평화의 집에서 북측 지역인 판문각으로 이동, 숙의를 거쳤다. 오후 5시 북측 대표단이 복귀하면서 합의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곧바로 합의문이 나오지는 않았다. 남북 대표단은 24일 밤 늦게까지 수정안을 두고 논의를 거듭하다 결국 자정을 넘기면서 극적으로 타결했다.
남북이 합의한 데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변심도 영향을 미쳤다. 북한이 이미 부인했던 지뢰 도발을 사실상 시인하고 특정 주체를 거명하며 유감 표명으로 사실상 사과를 했다는 점은 이례적이다. 북한이 8월 들어 대남 도발로 나서다 이번 합의를 계기로 남북관계 개선 기조로 나섰다는 해석까지 가능하게 했다. 물론 이번 합의가 원론적 성격이 강한 만큼 9월 남북 당국회담에선 세부 쟁점을 둘러싼 신경전도 이어질 전망이다. 또 9월 초 남북 적십자 실무회담을 거쳐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진행되고 남북이 합의대로 민간 교류협력을 늘려갈 경우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수도 있다.
정상원기자 orn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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