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레 대여금반환소송을 보면, 소를 제기한 원고 측은 빌려준 돈이라고 하고 소송을 당한 피고 측은 그냥 증여로 받은 돈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법률적으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금원이 건네진 경우 대여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도 아니고, 부부 사이도 아니고, 용돈을 주는 관계도 아닌데 성인끼리 돈이 오갔다. 그렇다면 그냥 줄 리는 없고 빌려준 것이라 보는 것이 상식에 맞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반대다. 그들은 반대로 기업가들로부터 돈을 받아도 “(대여관계에 따라) 빌린 돈”이라고 주장한다. 반환 의식이 유독 투철해서일까? 그런데 그렇게 급전이 필요했다면 금융권에서 빌리면 되지 왜 굳이 기업가들로부터 돈을 빌려 의심을 사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답은 간단하다. 첫째 정말 빌린 것일 수 있다. 둘째 받았는데, 양형을 줄이고 싶다. 대체로 둘째의 경우일 것이다. 오해해서는 안될 게 있다. 대여라고 해서 모두 죄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여라고 하더라도 이자를 받지 않은 무상대여의 경우, 이자 상당의 금전적 이익을 제공한 것으로 보아 역시 뇌물죄든 정치자금법위반이든 죄는 성립한다. 다만 증여(뇌물에서는 공여라는 표현이 더 맞다)보다 형이 훨씬 더 가벼울 뿐이다.
최근 대여인지 증여인지 화제가 되었던 유명한 사례 두 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이들은 돈을 과연 빌린 것일까 받은 것일까. 독자들이 보고 판단해 주길 바란다.
첫 번째 사례는 정치인 H 이야기이다.
한 건설사의 대표이사가 비자금을 조성하여 정치인 H에게 세 차례에 걸쳐 총 금 9억원을 주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빌려줬다’가 아니었다. 그 건설사의 회계관리 내역에도 출금내역이 있고, “H”로 추정되는 글자가 기재되어 있다. 그 대표이사는 9억 중의 딱 1억을 딱 한 차례 수표로 준 적이 있다고도 진술했다.
그런데 그 1억짜리 수표가 시간이 지나 정치인 H의 여동생 전세금으로 쓰인 것이 밝혀졌다. 그 후 건설사의 대표이사가 회사 부도에 충격을 받아 입원하자, 정치인 H의 비서관 K가 2억원을 그 대표이사에게 주었다. 바로 준 것도 아니고 1년 가까이 지나서야 2억원을 ‘갚은’ 것이고, K가 병원에 들르고 나서 H와 병중인 대표이사는 전화통화를 가졌다.
그 사이 H 또는 그 비서는 이자를 갚은 적이 없다. 이자율을 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환기한을 별도로 약정한 적도 없다. 당연히 소비대차계약서도 없다.
H는 돈을 빌린 것일까 그냥 받은 것일까? H는 정말 모르는 일이고, 되레 생활고를 겪고 있던 K가 빌린 것인가? 그럼 K는 자기가 급전이 필요해서 돈을 빌려놓고서는 왜 그 돈을 쟁여놓고 있다가 H의 여동생에게 빌려주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을까?
다들 눈치챘겠지만 한명숙 전 총리의 사례였다.
두 번째 사례는 L시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L시장의 선거대책본부장인 K는 선거운동기간 중 A라는 사람으로부터 4,500만원이 들어있는 통장의 현금카드를 건네 받았다. 검찰은 L시장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허용되지 않는 기부를 받았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L시장 측은 4,500여만원 중 K씨가 받은 현금카드의 금액 일부는 K 자신의 개인 채무 변제 등에 사용됐고 나머지는 L시장이 “빌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4,500만원이 정치자금수수 목적이었다면 흔적이 남는 현금카드가 아닌 현금으로 줬을 것이라며 말이다.
법원은 어떻게 봤을까? 법원은 L시장 측의 주장을 믿어주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A가 L시장에게 증여한 것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본 것이다(그럼 L시장은 결국 무죄 선고를 받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다른 사업가 B로부터 500만원을 빌리고서는 이자를 갚지 않은 부분도 드러나, 그 부분에 대하여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이병선 속초시장 사례였다.
그런데 이병선 속초시장이 받은 돈은 증여가 아닌 것으로 보고, 한명숙 전 의원이 받은 돈은 증여인 것으로 본 이유는 무엇일까? 두 사람 다 “(비서관이 자신 모르게) 빌린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말이다. 소비대차계약서의 유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자의 변제 여부 때문이었을까? 두 번째 사례 역시 변호인이 저토록 치열하게 다툰 것을 보니 차용증도 없고 이자도 변제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한명숙 전 의원 사례에서는 “줬다”라는 진술이 있었다. 비록 법원에서 그 진술이 바뀌기는 했지만 줬다는 사람이 검찰에서 또렷한 기억력으로 구체적인 진술을 했다는 것이 이병선 시장 사건과의 가장 큰 차이였다. 반면 이병선 시장 사건은 준 사람이 빌려준 것이라 진술하니 명백한 증거가 없었다.
두 사건 모두 변호사들이 무척이나 힘들었을 듯하다. 내 의뢰인들의 말을 믿고는 싶은데 그 흔한차용증도 없고 이자도 갚은 적 없으니 이 얼마나 막막한가. 하여 정치인들께 조언을 드린다. 정말 돈이 필요하면 금융권을 통해 대출 받는 게 좋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정말 어쩔 수 없이 사업가한테 돈을 받았고 이를 “대여”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꼭 차용증을 써라. 그 후 원금까지는 아니라도 이자라도 틈틈이 갚아라. 그래야 변호사도 양심에 반하지 않고 변호해 줄 수 있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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