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태로 북한은 훨씬 많이 잃었다
‘최고존엄’ 상처로 체제 유동성 커져
상정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이만하면 ‘일단은’ 됐다. 대차대조표상 그렇다는 얘기다. 명백한 증거에도 주체 없이 포괄적 유감에만 그쳤던 과거 도발 때와는 다르다. 합의문 2항은 ‘북측’과 ‘유감’을 연결시켰다. 어떻게 읽어도 행위 인정이다. 번번이 응대 없는 호통만 쳐왔던 입장에서 이 정도면 꽤 나쁘지 않은 진전이다.
“한번 붙어볼 각오로 끝까지 갔어야 했다”는 아쉬움도 있다. 북한이 기습적 국지교전 이상의 실력은 없다는데 동의하므로. 그러나 전투는 벌어지면 그 자체로 불가측한 생명력을 갖는다. 상황을 완벽히 통제, 관리할 수 있다는 확신과 능력이 전제다. 물론 국가이익의 결정적 침해나, 감당키 어려운 굴욕을 강요당하는 경우는 다르다.
제2연평해전이나 천안함 때 아무 보복행동조차 못했던 게 진짜 굴욕이었다. 이번엔 그들의 가장 아픈 부분을 직격했고, 처음으로 격에 맞는 상대를 불러 앉혔으며, 어쨌든 제 짓임을 인정토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리 볼 상황은 아니다. 이마저 못했다면 그땐 그야말로 단호히 군사행동으로 나서 마땅한 굴욕적 상황이 됐을 것이다.
어떻든 결과는 나왔다. 논쟁보다는 꼼꼼히 복기해 향후 북한 관리방안을 정교하게 다듬는 일이 실질적이다. 그 점에서 이번 합의를 대뜸 국면전환 조짐으로 보는 건 성급하다. 대북문제는 최악을 상정하는 게 원칙이다. 도리어 상황의 유동성이 더 커졌다고 보고 접근하는 게 옳다. 무엇보다 북한 입장에선 ‘최고존엄’을 위해 문제를 일으켰으나, 결과적으로는 존엄을 크게 훼손한 셈이 됐기 때문이다.
이번에 북한은 전과 같은 나름의 전략적 일관성이나 치고빠지기식 능란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남조선과 미제의 도발’에 전 인민을 (준)전시상태로 몰아넣고는 며칠 만에 스스로 유감표명으로 주저 앉았다. 더욱이 외신기자들까지 불러 남조선 자작극임을 주장한 직후다. “그 누구(시진핑)도 자제타령 말라”며 한껏 부린 호기도 무색해졌다. 도발 방식의 치졸함이나, 어찌할 수 없게 커져버린 상황, 화급히 봉합하기까지 북한은 곳곳에서 미숙함을 드러냈다.
김정은의 ‘실력’이 노정된 상태에서 북한 내부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하긴 어렵지 않다. 주민의 이목은 통제할 수 있어도 뻔히 지켜본 평양 지휘부에 대해서는 더한 공포ㆍ강압통치로 허물을 덮으려 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더욱이 독재자들의 속성이 책임전가와 함께 ‘주목(注目)의 독점’일진대, 이번에 자신을 대리한 역할로 국내외적으로 부각된 인물들이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황병서를 비롯한 협상단의 신변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이유다.
체제가 안정화되고 통치에 자신감이 붙어야 관계개선의 득실을 따지고, 우호적 국제환경 조성에도 눈을 돌릴 수 있는 법이다. 아직도 최고존엄의 권위와 체제유지에 급한 상황에서 대외적으로 전향적인 태도변화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남북관계에서 당장의 폭우는 피했으나 먹장구름은 더 두꺼워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낙관은 이르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 두만강을 따라 북중 국경지대를 장기 탐사취재했던 적이 있다. 거기서 만난 많은 북한사람들과 중국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김정일은 오래 가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필요한 정통성 확보(폐쇄적 강압통치)와 ‘밥 해결’방법(개방 개혁)이 상호모순이므로 어떻게 하든 결국은 붕괴로 이어지리란 것이었다.
당시의 예측은 틀렸지만 김정은의 북한도 여전히 같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아니, 북한의 대내외적 환경은 그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나빠져있는 상태다. 5년 전 3대 세습결정 직후 ‘북한이 확실히 파국으로 가는 방아쇠를 당겼다’는 칼럼을 썼다. 공포와 통제에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번 일로 임계점 도달이 가속화할 수도 있다. 한반도 상황의 예측 불가성이 그만큼 커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당장의 작은 득실계산에 연연해할 때가 아니다. 큰 그림을 그리고, 상정 가능한 모든 격변사태에 총력을 기울여 대비해야 할 상황이다. 문제는 다시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지금 또 묻는다. 과연 우리는 준비가 돼있는가?
주필 jun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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