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실습생 시절 '요리의 정석' 알려준 소스

입력
2015.09.01 20:18
0 0
홀랜다이즈 소스를 얹은 에그타르트
홀랜다이즈 소스를 얹은 에그타르트

어릴 때부터 요리책 전집을 탐독하며 맛을 상상하는 데 푹 빠져 있었다. 율란 같은 전통 디저트에서부터, 그래스호퍼 같은 생경한 칵테일, 달콤한 빵과 케이크 종류 등의 레시피를 침을 흘리며 정독했다. 그러면서도 요리사가 되리라는 생각은 1%도 하지 못했다. 공대 졸업하고 다른 일을 하면서도 요리의 꿈을 버릴 수 없어, 불현듯 유학을 떠난 게 27세. 언어적 한계에 크게 부딪쳤다. 하지만 하고 싶던 일을 하고 있다는 기쁨이 스트레스보다 훨씬 컸다. 배우고 직접 만들어 보는 매일의 행복감으로 충만했다.

학교 교육과정 중간에 18주 동안 외부로 인턴십을 나가야 했다. 두 달 동안 거의 주말마다 뉴욕이나 보스턴에 있는 레스토랑에 스타지(stageㆍ무급으로 일하며 경험을 쌓는 것)를 하러 다닐 정도로 일할 곳을 찾는 데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제일 가고 싶던 레스토랑에서는 끝내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조그만 말라깽이 여자아이로 보여서 못 미더웠던 걸까. 인턴십 시작 전 막바지까지 한창 게으름을 피우던, 같은 반 남자 아이 두 명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꽤 서러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사건이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무척 유명한 레스토랑의 실습생은 대개 주방에서 재료손질이나 프렙(기초 조리과정)만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인턴십을 나간 곳은 조금 덜 유명하긴 하지만, 프렌치 요리가 베이스인 셰프가 있던 레스토랑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거의 바닥이었던 시절, 그 레스토랑에서 일한 건 정말 천운이었다. 훨씬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요리사로 사는 게 나에게 맞는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물론 그런 깨달음을 얻기까지 주방에서 이리저리 휘둘리기 바빴다. 일을 하다 보면 선배 요리사와 수셰프(sous chefㆍ부주방장), 셰프가 하는 말이 다 달랐다. 선배가 하라는 방식으로 하고 있으면 셰프가 와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화를 냈다. 셰프 말대로 하면 수셰프가 와서 또 뭐라고 했다. 그때는 자신감이 너무 없을 시기여서, 셰프가 한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금세 잊고, 방금 지적한 다른 사람의 말에 솔깃했다. 주방의 우두머리인 셰프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막상 더 자주 부딪히게 되는 수셰프나 선배의 말을 순간적으로 따르게 된다는 게 문제였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중에 고마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홀랜다이즈 소스를 만들 때였다. 계란 노른자와 녹인 버터가 주재료인 홀랜다이즈 소스를 생선 요리에 곁들이는 메뉴가 있어서 매일 만들었다. 학교에서 워낙 신경 써서 배웠던 기억이 나서 중탕 물을 준비해 꼼꼼히 만들고 있었다. 그때 그곳에서 오래 일했던 멕시코인 요리사가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리냐”는 거였다. 그는 믹싱볼에 계란 노른자를 넣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익히는 말도 안 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 앞에서 아니라고,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해야 했지만, 워낙 소극적인 성격상 ‘선배의 말을 듣는 게 맞겠다’며 내 방식을 바꾸었다. 무엇보다 일을 늦게 하는 아이라는 딱지가 붙는 게 너무 싫었다. 참 바보 같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과정을 지켜야 아름다운 결과물이 완성된다는 것을 잠시 간과한 거다.

며칠 후 셰프가 홀랜다이즈 소스를 만드는 나를 보고 충격 받은 얼굴로 물었다. “너 지금 뭐하고 있니?” 셰프는 조리과정을 직접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했던 정석의 그 방법이었다. 단지 너무 우아하고 편안해 보이는 자세였다는 게 다를 뿐.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10년도 더 지난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로는 ‘정석대로, 주변의 여러 의견에 휘둘리지 말고 집중해서 일하자’가 내 모토가 됐다. 처음에는 조금 늦어 보일 수 있지만, 지켜야 하는 것은 꼭 지켜서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빠르고도 정확히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시간에 쫓기면서 일을 해내야 하는 직업이 요리사다. 우왕좌왕하기 쉽고 대충 빨리 하는 방식으로 타협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지금 내가 이끌고 있는 주방에 들어 오는 후배 요리사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꼭 들려 주곤 한다. 자신을 믿고, 집중해서 조금씩 나아가자고! 스트레스 받고 바쁠수록 심호흡 크게 하고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지나가 있을 거라고 말이다.

김은희 셰프
김은희 셰프

*미국 요리학교 CIA를 졸업한 후 뉴욕 프렌치 레스토랑 불레이, 크뤼 등에서 일했다. 2009년 서울 서래마을에 ‘더 그린 테이블’을 열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