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 일어나라. 밥 묵어야지.” “아~~~아빠, 조금만 더 자고.”
큰딸이 고등학교 3년간 기숙사 생활을 접고 올해부터 대학 생활을 집에서 시작하면서 우리집 아침은 대개는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딸내미가 게을러서 그런 것은 아니다. 아빠 엄마가 새벽형 인간이다 보니 오전 6시를 넘겨서 자고 있는 꼴을 보지 못해서 그렇다. 하루 일과 중 일어나는 게 가장 힘든 일이란 것을 큰딸은 안다. 이제 2학기가 시작되면서 오전 9시부터 강의를 들어야 하는 딸은 자신의 기상을 아빠 책임으로 슬쩍 떠넘긴다. “여섯 시 반에는 일어나야 해요.”
큰딸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대견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다. 여름방학 때는 농활도 가고, 주말에는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도 한다. 그만하면 대학 1학년치고 제 궤도를 걷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딸아이의 변화가 다 성에 찬 것은 아니었다. 화장도 그렇고, 머리카락 염색도 처음에는 낯설었다. 모두 다 하는 것이라지만 난생 처음 겪는 일이라, 나는 매일 조금씩 고정관념을 허물어야 했다.
그 고정관념의 정점에 술이 있었다. 입학 초반 대학에는 무슨 회식이 그렇게나 많은지, 딸내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은은한 홍시 냄새를 풍기고 살았다. 입학 당시 집에서 귀가시간 조정위원회가 열렸다. 밤 12시까지 귀가를 주장하는 딸과 늦어도 10시까지 오라는 아내가 격돌했다. 딸은 “기숙사에 있는 친구들은 새벽에 들어가기도 한다”며 설득에 나섰으나 “세상이 험하다”는 엄마의 주장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대중교통으로 충분히 귀가할 수 있는 밤 11시로 최종 조정됐다.
딸내미는 매일같이 귀가시간 줄타기를 했다. 11시가 닥쳐서야 야구선수 슬라이딩하듯 간신히 둥지를 찾아 오는 것이었다. 오늘은 선배가, 내일은 동기들이, 그 다음날은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이는 날이 이어졌다.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고교 동창들과 만나고 귀가하는 날에는 홍시 냄새도 조금 짙어졌다. 귀가시간이 나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다.
“인마, 술 냄새를 이렇게 풍기고 다니면 어떡해”라고 핀잔을 주지만 “히히~ 아빠가 날 혼낼 처지가 아닐 걸”이라는 한 마디에 난 무기력해진다. 이 모양을 지켜보는 아내는 “부녀간에 자~~~알 한다”며 혀를 찬다.
내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해장국은 아내 몫이었다. 딸의 음주생활이 시작되면서 속풀이는 자연스럽게 내가 맡게 됐다. 그런데 요리학원에서 배운 51가지 한식 중에 딱히 해장국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음식이 없었다. 결국 인터넷 뒤져서 먹음직스러운 해장국 레시피를 따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해장국의 생명은 시원한 국물이다. 국물 맛 내는 데는 멸치와 다시마, 무, 대파 뿌리가 기본이다. 내장을 떼낸 멸치를 넣고 국물이 끓으면 건더기는 모두 버리고 주재료를 넣으면 그만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칫국부터 만들어줬다. 김치를 먹기 좋게 썰어서 넣기만 하면 반쯤은 요리가 끝난다. 김치국물에 양념이 배어 있어서 굳이 국간장에 소금을 넣지 않아도 입맛에 맞는다. 여기에 청양고추와 파를 조금 썰어 넣으면 끝이다.
만만한 것은 콩나물국. 멸치국물에다 간을 맞춘 후 콩나물 넣고 푹 끓이면 된다. 그 다음으로는 황태국이다. 황태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물에 담가뒀다가 멸치국물에 넣어 끓이면 그뿐이다.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 맞추고 계란도 하나 풀어주면 된다. 처음에는 황태를 다듬기도 거북하고 잘 먹지 않던 음식이라 거부감도 있었는데 해보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다 보니 재료를 이것저것 첨가하게 됐다. 일단 두부는 단골손님이다. 황태국에는 어김없이 두부를 썰어 넣는다. 그런대로 맛이 괜찮다. 김칫국에는 오뎅을 넣어봤다. 신기하게 두 음식의 궁합이 맞았다. 김칫국과 콩나물국, 황태국을 모두 한꺼번에 같이 끓여도 훌륭한 해장국이 된다. 이름하여 ‘김치황태콩나물국’, 붙이기 나름이다.
문제는 딸이 음주 후 아침을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해장국 차려놓고 밥 먹으라고 성화를 부려 보지만 딸내미는 “생각없어요”라는 한 마디로 잘라버린다. 결국 이 음식은 내 차지가 되고 마는 것이 우리집 해장국의 역설이다. 하지만 큰딸도 때늦은 속풀이를 한다. 아침만 먹지 않을 뿐이지, 점심 때가 가까워지면 아빠가 끓여놓은 해장국 한 그릇 뚝딱 하고는 학교에 간다. 어떤 날은 점심, 저녁 모두 아빠표 황태국으로 속을 다스린 적도 있단다.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비슷한 느낌이라고 한다. 참 멋들어진 비유다. 딸내미 해장국은 아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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