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외식이라고 하면 딱 하고 떠오르는 메뉴가 없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외식을 할 일이 자주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이가 생기고 나니 은연중에 무엇을 먹고 먹여야 할지를 더 심도 있게 고르게 되는 모양이다.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다. 우리 가족의 외식 메뉴를 사진으로 확인해 보면,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린 시절엔 갈비나 불고기를 파는 ‘구이집’에 자주 갔고, 유치원생 무렵부터는 양식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돈까스나 함박스테이크를 팔던 ‘경양식’ 집에 자주 다녔었던 모양이다. 학창 시절, 지방에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오시는 날은 항상 외식이었고 언제부터인가 거의 ‘중국집’으로 고정됐다. 우리 가족이 항상 다니던 ‘중국집’은 짜장면과 탕수육 위주의 ‘중화요리집’이 아닌 조금 더 크고 웅장한 ‘청요리집’이었다. 그 곳에 가면 아버지는 항상 우리 다섯 식구에게 일인당 메뉴 하나를 고르게 하셨고, 당신은 백주나 고량주 같은 독한 술을 한 병 정도 비우셨다. 워낙 잘 먹는 가족이기도 했지만 다섯 명이 다섯 가지 요리를 시켜 먹는 게 신기했는지 일 하시는 분들이 우리가 시키는 메뉴를 거의 외우는 모양새가 되었고 예약만 하면 그대로 음식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모두가 거의 손도 안대던 채소 볶음을 시키셔서 우리에게 먹이려고 하셨고, 누나는 지금도 좋아하는 류산슬을, 호기심이 많았던 형은 새우요리 위주로 시켰다. 나는 보통 ‘덴뿌라’라고 불리는, 탕수육에 소스를 뺀 고기 튀김을 시켰는데 튀김옷 안 쪽으로 알싸하게 밴 생강과 마늘 향이 지금도 가끔 입 속에서 맴돌 때가 있다. 아버지는 보통 그 시절에 동네 중식당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요리인 ‘베이징카오야(북경식 오리)’를 드셨는데 그 바삭하게 구운 오리 껍질을 밀전병에 싸서 얇게 썬 파를 가득 넣어 해선장에 찍어 맛나게 드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끔 우리에게 권하셔서 먹어보면, 오이와 파 때문에 그리 맛나지는 않았지만 평소 무뚝뚝하고 무섭던 아버지께서 손수 싸주시는 것이 좋아서 넙죽넙죽 받아 먹었던 기억도 꽤나 선명하게 난다.
사실 그렇게 몇 년 외식을 하는 동안에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솔직히 모두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엄한 아버지와 함께 한 외식은 이렇게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우리 가족은 항상 웃고 있었다’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가게에 손님들이 오시면 어떠한 손님들이라도 관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무릇 주방장이란 손님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음식을 만들고 서비스를 해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 중에 아이들이 포함된 가족을 보면 특히 더 눈길이 간다. 그건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기 전부터 그래왔다.
가족들이 함께 하는 외식은 단순히 밖에서 한 끼 때우는 식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꼭 기억에 남아야 하고 큰 의미나 중요한 일이 생겨서 하는 외식일 필요도 없다고 본다. 아마도 그 아이들 기억 속의 외식이 어떤 잔상과 추억으로 남을지는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해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그 느낌을 다시 받을 수만 있다면 짜장면도 좋고, 돈까스도 좋고, 갈비도 좋다. 하물며 피자나 라면이면 어떠랴. 부모님의 그 자상함 속에서 형제들이 고른 음식을 나눠 먹던 그 순간을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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