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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제목도 맘대로 달 수 없던 그 시대를 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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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제목도 맘대로 달 수 없던 그 시대를 담았죠

입력
2015.09.03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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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서 태어난 한국전쟁 상이군인

전쟁ㆍ광주민주화운동 등 형상화 해

유ㆍ무형 폭력에 둘러싸인 인간 그려

“말로 설명하지 못할 내 삶의 이야기를 그려왔는데 그것도 마지막이네요.” 황용엽씨는 지난달 31일 기자간담회 후 자신의 작품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말로 설명하지 못할 내 삶의 이야기를 그려왔는데 그것도 마지막이네요.” 황용엽씨는 지난달 31일 기자간담회 후 자신의 작품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31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기독교 집안이라 북한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가족과 생이별했다. 국군에 입대했으나 전투에서 오른쪽 다리를 다쳐 상이군인이 됐다. 북쪽에서 한 번, 남쪽에서 한 번 영창을 다녀왔다. 북쪽에서는 3일 동안 빛도 없는 지하에 갇혀 물조차 마시지 못했다. 남쪽에서는 미군 부대에 허가 업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일주일간 갇혀 “상식과 존엄이 사라진 채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경험했다.

화가 황용엽(84)의 파란만장한 인생 전반부 이력이다. 여러 차례 사선을 넘은 경험 때문인지 1970년대부터 그린 유화 ‘인간’연작은 거칠고 어둡고 답답하다. 황용엽의 그림 대부분이 역삼각형 얼굴을 한 사람과 그 주변을 둘러싼 거미줄 같은 날카로운 선들로 구성돼 있다. 짙은 회색으로 가득 찬 캔버스에는 표정 없는 사람들이 철조망과 감옥의 쇠창살 사이로 무기력하게 앉아 있다. 유무형의 폭력에 포박돼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을 형상화한 것이다.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회고전 ‘인간의 길’ 전시장에서 만난 황용엽은 “화가란 결국 자신의 인생에서 벗어나서 작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림은 이렇지만 제목은 의외로 담백하다. 1960년대 이전에는 ‘여인’ 혹은 ‘소년’,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인간’, 1990년대 이후에는 ‘내 이야기’‘어느 날’‘삶 이야기’라 제목을 붙였다. “제가 마음 속으로 붙인 실제 제목은 ‘공포’나 ‘절규’지만, 제목도 마음대로 붙일 수 없는 엄혹한 시대였기에 ‘인간’같은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결국 이게 제가 보는 사람이고, 제 삶의 이야기였으니 잘못된 제목도 아닙니다.”

특히 1982년 신세계백화점 개인전에서 발표한 작품들은 더 인상적이다. 회색조 위주였던 그림에 빨강 파랑 노랑 삼원색이 등장했다. 화폭 속 묶여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팔을 흔들고 격렬하게 움직인다. 황용엽은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언론 통제가 된 한국에서와 달리 광주 소식을 왜곡 없이 들을 수 있었던 그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황용엽은 인간을 옭아매는 모든 폭력을 경계했다. 북에 누나와 남동생을 두고 온 실향민이라면 통일을 바랄 법 하건만 전혀 낭만적인 기대가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통일이 돼선 안 된다”고까지 말했다. 전쟁 경험 탓이다. 당시 인민군이 평양에서 반체제 인사들을 학살하고, 뒤에 그 가족들이 공산당원들을 처참하게 보복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했다.“인간이란 언제든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지금 통일이 되더라도 남북간에 원한이 남아있기 때문에 보복이 일어날 거라 생각해요. 먼 훗날에나 가능할 이야기입니다.”

1990년대 이후 황용엽은 유년기를 보낸 평남 강서군 풍경이나 무속 신앙을 소재로 부드러운 그림을 그렸다. 특유의 ‘날카로운 인간’ 형상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제는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고 치유하겠다는 의미다. 회고록‘삶을 그리다’(씨앤에이)를 발간하는 등 화가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있는 황용엽은 “이번 전시가 마지막일 것 같다”고 말했다. “말로 설명하지 못할 내 삶의 이야기를 그려왔습니다. 이렇게 한 자리에서 정리할 수 있어 큰 영광입니다.” 전시는 10월 11일까지 열린다.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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