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참가자들이 팀 구성해 대전…게임 못할 땐 욕설·조롱 등 쏟아져
사이버 모욕죄 절반이 '롤'과 연관
청소년 욱하는 감정 일부러 건드려 악의적 고소하는 합의금 헌터 극성
경찰들은 늘어나는 신고에 골머리
대학생 이모(24)씨는 지난달 온라인 대전 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ㆍ롤)’를 하던 중 심한 욕설을 들었다. 팀플레이로 진행되는 게임에서 등급이 낮은 이씨가 전략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패배 위기에 놓이자 같은 편에 있던 전모(21)씨가 그를 조롱하며 상스러운 말을 쏟아낸 것이다. 이씨는 해당 화면을 캡처해 전씨 등 게이머 2명을 경찰에 모욕죄로 고소했다. 이후 이씨는 합의금으로 100만원을 요구해 이중 한 명에 대해서는 30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고소를 취하했고, 나머지 한 명과는 아직 합의가 안 돼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인기 온라인 게임 롤로 인한 모욕죄 고소가 급증하고 있다. 게임 도중 욕설을 들은 이들이 합의금을 노리고 너도나도 고소장을 제출하는 것이다. 이로 인한 수사력 낭비로 경찰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롤은 익명의 참가자들이 5대5로 팀을 구성해 상대 진영 건물을 부수고 상대 캐릭터를 공격하는 게임이다. 2012년 7월 23일 이래 163주째 주간 PC방 점유율 1위를 놓치지 않고 있을 정도로 국내에서 최고 인기를 자랑한다.
문제는 팀워크가 중시되는 게임 속성 상 실력이 떨어지거나 게임을 망치는 유저가 있으면 원망조의 욕설이 난무하기 쉽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아예 이런 게임 특성을 노리고 욕설을 유도한 뒤 합의금을 타내는 전문적인 ‘합의금 헌터’까지 가세하면서 롤이 모욕죄 남소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세월호 참사 당시 한 언론과 인터뷰했던 홍가혜씨가 자신에게 욕한 네티즌 1,500여명을 무더기로 고소한 뒤 피고소인들에게 합의금을 받고 사건 무마에 나선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를 모방한 합의금 헌터가 증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9일 경찰청 사이버안전국 통계에 따르면 사이버 명예훼손 및 모욕죄 신고 건수는 2010년 5,712건에서 2014년 8,880건으로 50% 이상 증가했다. 올해는 7월까지 벌써 지난해 전체 건수에 육박하는 8,488건을 기록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사이버상 모욕죄로 경찰서를 찾는 고소인 중 절반 이상은 게임 롤과 연관돼 있다”고 설명했다.
모욕죄가 성립되려면 제3자가 욕설을 인지하는 ‘공연성’과 피해자 신분이 드러나는 ‘특정성’이 구비돼야 한다. 때문에 합의금 헌터들은 게임 시작과 동시에 “나는 ○○에 사는 ○○대 ○○학과 아무개다”라고 굳이 신분을 밝힌다. 이후 게임이 시작되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등 일부러 게임을 망치는 방식으로 팀원들의 욕설을 유도한다. 욕을 한 것은 잘못이지만 이처럼 의도적으로 욱하는 감정을 유도한 경우에는 피해자에 가깝다.
더구나 피고소인 대부분은 청소년이다. 부모들은 자식의 범죄경력이 남을까 두려워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30만~200만원에 이르는 합의금을 주며 끝내는 경우가 많다. 경찰 관계자는 “합의금 헌터들은 주로 20대인데 일부러 청소년이 게임을 많이 하는 오후 6~10시 사이에 이런 수법을 쓴다”고 귀띔했다. 얼마 전부터는 합의금을 타낸 후기를 올린 블로그도 등장했다. 욕설 유도 방법 및 절차, 합의금 액수를 자랑인 양 공개하면서 범법 행위를 부추기고 있다.
쏟아지는 악의적 고소로 인한 경찰의 수사력 낭비는 심각한 수준이다. 일선 경찰서 사이버팀 관계자는 “심할 때는 한 명이 50명 이상을 고소하기도 한다”며 “합의금 헌터로 의심은 가나 접수를 말리기도 어렵고 피고소인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하려면 일일이 영장을 신청해야 해 다른 업무를 볼 수 없을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게임 배급사인 라이엇 게임즈 코리아 관계자는 “욕설 필터링을 강화하고 게임 중에라도 제재를 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지만 욕설을 100%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검찰도 이런 문제점을 감안해 지난 4월 ‘인터넷 악성댓글 고소사건 처리방안’을 내놓고 고소를 남용한 것으로 판단될 때에는 각하나 교육조건부 기소유예 등을 활용하기로 했다. 또 고소인이 피고소인을 협박하거나 고액의 합의금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공갈죄 또는 부당이득죄 등을 적용하기로 했으나, 아직까지는 적용 사례가 없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어렵더라도 경찰과 검찰이 고의성 여부를 꼼꼼히 따져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판례를 만들어야 성숙한 온라인게임 문화가 조성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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