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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휴직때 쌓아 올린 탑… 복직 후 '와르르'

입력
2015.09.1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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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든 탑이 무너지랴' 했지만 이 아빠의 육아는 이 속담을 비켜가는 것 같다. 휴직까지 해서 1년 동안 손수 밥해 먹이고, 씻기고, 기저귀와 옷 갈아 입히며 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데리고 다니며 구경시켜 주고 놀아주고, 들려주고 읽어주면서 쌓아 올린 ‘탑’이 요즘 하나 둘씩 무너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25개월 된 아들놈은 요즘 아빠를 싫어한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빠 싫어", “아빠 저리가”, “(침대에서) 아빠 내려가”,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면) “아빠 밖에 나가”라는 말을 심심찮게 내뱉는다. 심지어 자면서도 “아빠 안 해요”, "아빠 먹기 싫어요"처럼 ‘아빠’ 뒤에 부정어를 조합한 말로 잠꼬대를 할 정도다. 반면 엄마랑은 노래도 같이 부르고 놀면서 찰떡 궁합을 과시한다.

시도 때도 없이 ‘번개파워’를 외치는 바람에 아내에게 떠밀리다시피 해서 간 서울유니버설아트센터 공연장에서. 아들은 그 뒤로 더 격하게‘번개파워’를 외친다.
시도 때도 없이 ‘번개파워’를 외치는 바람에 아내에게 떠밀리다시피 해서 간 서울유니버설아트센터 공연장에서. 아들은 그 뒤로 더 격하게‘번개파워’를 외친다.

육아휴직 시절 아들을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쏘다닐 때 “그렇게 잘해줘도 소용없다.” “나중엔 하나도 기억 못한다”며 이 아빠의 유난스러움을 지적하던 지인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거구나! 하는 생각도 최근 들기 시작했다.(당시 이 아빠는 그렇게 이야기 하는 이들에게 ‘아들이 기억 못해도 좋다. 아들이 더 많이 웃고 더 즐거우면 그걸로 족하다’며 통 큰 행세를 했다.)

아무리 어린 아들이라지만 이 정도 되고 보면 보통 서운해지는 게 아니다. 모처럼 책도 읽어주고 같이 놀아줄 요량으로 서둘러 집에 왔는데도 아들이 이러면 허탈하기 짝이 없다. 배신감은 또 어찌나 드는지…. ‘아빠 밖에 나가’ 할 땐 정말 그 길로 가출을 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때도 있다. 아들 잠꼬대에 화들짝 놀라 깬 뒤에는 한참을 뒤척였다.

‘다른 부자(父子)들보다 더 친한 아빠와 아들.’ 육아휴직 1년 동안의 성과를 요약하면 딱 이정도 일 텐데, 1년을 투자해 다졌던 부자지간의 친밀도는 복직 3개월 만에 엷어지고 엷어져 여느 부자지간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이 아빠의 판단이다. ‘나는 친구 같은 아빠가 맞는가’, ‘나는 육아휴직을 하지 않은(못한) 아빠들보다 아들과 더 잘 지내는가’라고 자문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출근하는 이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서럽게 울던 아들놈이, 휴직 중엔 내가 아니면 밥도 안 먹고, 옷도 안 입고, 책도 싫다며 울고불고 하던 놈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머리가 한가해지면 이런 생각들이 밀려온다.

정말 지난 3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대체 이 아빠에겐, 아들에겐 또는 우리 부자에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자체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또래 아이를 키우는 친구, 지인들에게 아들의 증상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원인은 대략 한 가지로 압축됐다. 애 엄마들이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에 비해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적다는 것이다. 예상했던 일이기도 한데, 한 마디로 애 엄마와의 ‘아들 관심 쟁탈전’에서 웬만한 아빠들은 게임이 안 된다는 이야기다.

지난달 휴가 때 찾은 강원 평창의 하늘 목장에서. 이국적인 풍경에, 선선한 공기에 즐거워 할 줄 알았던 아들은 이 목장 투어 내내 무료해 했다. 앞으론 뭘 하든 아들 입장에서 생각하기로 했다.
지난달 휴가 때 찾은 강원 평창의 하늘 목장에서. 이국적인 풍경에, 선선한 공기에 즐거워 할 줄 알았던 아들은 이 목장 투어 내내 무료해 했다. 앞으론 뭘 하든 아들 입장에서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 이 아빠의 귀가 시간만 놓고 봐도 그렇다. 일찍 들어가면 오후 8시. 아들이 9시에서 10시 사이에 잠드는 걸 감안하면 이렇게 서둘러 집에 가도 아들과 놀아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시간 남짓이다. 이런 날도 일주일에 많아야 이틀이니 이 아빠가 아들의 환심을 사기는 쉽지 않고, 아내를 이길(?) 도리도 없다.

아직 어린 아들에게, 하얀 종이와도 같은 아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또 아내를 무어라 탓하겠는가. 모두 속 좁은 이 아빠 탓이다. 서운함과 허탈감, 열등감이 마구 뒤섞인 이 묘한 기분을 내색할 수는 없다. 또 그랬다간 속만 더 쓰릴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 때 휴직을 하고 주양육자 신분이었다 하더라도 저녁이 없는 날들의 연속인 이 세상에선 복직하고 나면 모든 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한결 가벼워졌다.

이 아빠의 심란함을 읽었는지 아내가 한 마디 붙인다. “00(아들)가 ‘아빠 언제 와요?’, ‘아빠 회따 갔어요?’ 하면서 어제 아빠를 얼마나 기다렸다고.” 확인 안 되는 일이지만, 그 말 한마디에 이 아빠는 다시 힘을 낸다. ‘그래! 이번 주말에 아들 좋아하는 공연도 하나 보여주고, 동물원 구경도 가자. 더 재밌는 책도 있는지 한번 알아보자.’

좀 쉬고 싶더라도, 피곤해도 주말에 더 부지런을 떠는 수밖에 없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댈 게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서 아들과 놀아줘야 그 공 들였던 탑이 더 이상 내려앉지 않겠지? 다가오는 주말은 이 아빠가 진짜 아빠로 부활하는 날이다. 패자부활전이 있는 날이다.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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